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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故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

관리자 0 433 2016.11.03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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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새벽 대한민국 제 14대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올해 88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6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양김(兩金) 시대'라 불리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축을 이끌어온 인물이다. 

 

영남과 호남을 각각 대표하여 한국 현대 정치사의 양대 산맥을 이루던 두 사람은 군부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벌인 '동지'이자, 대통령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숙명의 ‘라이벌’이기도 했다.

 

김대중·김영삼이냐 김영삼·김대중이냐 누구 이름을 먼저 하느냐 까지도 싸웠던 대한민국 정치의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과 김영삼의 삶은 서로 닮은 듯 달랐다. 양김 모두 대한민국의 정치 중심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며 동지이자 라이벌로 같은 자리에 서고,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도 있었지만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부터 자신의 뜻을 관철 시키는 방법까지 확연하게 달랐다. 서로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에 DJ는 "김영삼 씨는 대단히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고 답하였고, 같은 질문에 YS는 "김대중 씨는 아주 쉬운 문제를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고 화답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양대 산맥이자, 현대 정치사의 두 거물 정치인이 겪었던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을 나란히 비교해 보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양김 시대’라는 한 챕터를 정리해 보는 동시에, 역사가 주는 교훈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는 기회를 가져보고자 한다. (편의상 전 대통령은 호칭은 생략하고 이니셜 YS와 DJ로 표기한다.)

 

어린시절

YS는 경남 거제에서 멸치어선 10척을 보유한 지역유지 김홍조 옹의 1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아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반면 DJ는 전남 신안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농업 외에도 어업, 대금업, 양조장 등을 운영하던 부친 덕에 살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DJ의 모친은 정실이 아니었고, YS는 손이 귀한 집안의 외아들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두 사람의 유년시절은 꽤 많이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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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입문

YS는 서울대 철학과 3학년 시절에 이승만 정권의 초대 외무부 장관을 지낸 장택상의 선거운동원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장택상의 비서가 되었고, 그 해 장택상이 국무총리가 되면서 자연스레 국무총리 비서관이 되었다. 1954년 거제군의 자유당 소속 후보로 출마해 부친의 후광과 영남에서 가장 큰 고무 공장을 운영하던 장인의 지원에 힘입어 만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이는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은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이며, YS는 추후 헌정사상 최다인 9선 의원에 오른다. 반면 DJ는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사업에 성공해서 큰 돈을 모았고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에 참여하며 정치에 입문한다. 이 이력이 그를 좌파로 공격하는 시작점이 된다. 친일 고문경찰 노덕술과 함께 여운형 암살사건의 배후로 거론되기도 하는 장택상은 사건 당시 수도경찰청장(서울경철청장)이었다. 두 사람의 출발은 이처럼 아주 달랐다. DJ는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목포시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그 후로 민주당 소속으로 4대, 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내리 낙선한다. 강원도 인제에서 5대 보궐선거에 처음으로 당선이 되지만 3일 후 5.16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국회의원 선서조차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첫 번째, 두 번째 대결

YS가 이승만의 ‘3선 개헌’에 반대하여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으로 입당하면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같은 정당 소속이 된다. 1960년 신민당에 입당하여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첫 번째 경선을 펼쳤는데 YS가 승리한다. 이후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대선후보 경선에서 1차 투표에서는 YS가 승리했으나 2차 투표에서 DJ가 이김으로써 첫 대결의 패배를 설욕한다. YS는 경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대선에서 “DJ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고 곧 나의 승리다"라며 DJ 지원유세에 나섰다. 그러나 DJ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95만표 차로 패배하고 말았다. 

 

 

정치 탄압

이후 두 사람은 군사독재정권의 핍박을 받는 시련기를 보내며 주요 정치적 국면에서 '동지'로 협력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막대한 금품을 살포하는 등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도 겨우 95만 표 차로 DJ에게 이긴 박정희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선거 이후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반독재 투쟁을 하는 DJ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1973년 8월 도쿄에서 반 박정희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그랜트 팔레스 호텔에 투숙하던 DJ는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대형 선박으로 끌려간 뒤 30kg의 쇳덩이를 매달고 수장될 위기에 처한다. 이때 DJ를 살리는 무전이 날아오는데 납치사건의 배후가 중앙정보부임을 파악한 주한미국대사 하비브가 박정희에게 DJ를 죽이면 안 된다고 박정희에게 경고했기 때문이다.

YS는 1979년 8월 경영난을 이유로 폐업한 데 항의하기 위해 신민당 당사에 몰려와 농성을 벌이던 YH무역의 여공 200여명을 비호하다가 2,000명이 넘는 경찰병력에 의해 23분만에 진압되고 상도동 자택에 가택 연금된다. YS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 철회를 요구하고 박정희 하야를 외치다가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이 다시 타오르게 되고, 10월 16일 부산대생으로부터 시작된 시위에 박정희가 계엄령을 선포하자 시민들까지 합세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부마항쟁’이다. 부마항쟁을 둘러싼 김재규(중앙정보부장)와 박정희, 차지철(경호실장)의 시각 차이와 갈등은 결국 10.26사태(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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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박정희 대통령 피살 이후,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은 두 사람은 불행히도 대통령 자리에 마음을 뺏겨 닥쳐올 앞날을 보지 못한다. 양김은 서로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YS는 지난번에 양보했으니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고 주장했고, DJ는 YS로는 김종필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재야인사들과 시민들이 간절히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였고,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고 공수부대를 광주에 투입한다. 5월 18일 아침, 휴교령이 내려지면 학교 정문 앞에서 모인다는 약속대로 학생들이 전남대학교 앞으로 모였고, 전남대에 주둔하던 7공수여단은 학생들을 구타하기 시작한다. 5월 19일에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공수부대를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일반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참여하게 되고, 계엄군은 광주 전역의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선포한다.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M16 소총으로 난사를 했다. 자국민을 향한 총성은 무려 10분간이나 지속됐고, 5월 27일 새벽 5시 10분, 계엄군이 도청을 완전히 장악함으로 무력탄압이 종료된다.

 

가택연금 중이던 YS는 신군부의 강압에 못 이겨 1980년 8월 13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할 것을 선언했고, DJ는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와 '반국가단체결성'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는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사형 중단 압력이 거세어 짐에 따라 전두환은 1981년 1월 레이건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가면서 DJ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해주고, 82년 2월에는 다시 20년 형으로 그리고 그 해 연말 형집행정지로 석방하면서 미국으로 쫓아낸다.

 

 

민주화 운동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단독으로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의 간접선거에서 총투표수 2,525표에 찬성 2,524표(99.96%), 무효 1표로 제 11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1983년 5월 18일 YS는 5.18 광주민주화 운동 3주년 기념일부터 6월 9일까지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 농성에 들어간다. 5월 25일 단식으로 심신이 쇠약해지자 강제로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된다. 전두환을 대신해서 민정당 사무총장 권익현이 YS의 병상을 찾아와 단식을 중단해줄 것을 수 차례 촉구하였으나 YS는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고 하며 돌려보낸다. 전두환에 의해 강제로 정계은퇴를 당한 것에 대한 저항 내지는 광주항쟁 3주년을 기해 야당 인사들의 단결을 노리고 거행한 이 단식투쟁은 YS 측근들의 신속한 대응으로 바로 외신에 알려지게 되고 결국 가택연금 해제를 얻어내게 된다.

 

두 김씨를 따르던 정치인들은 1983년 5월 YS의 단식투쟁과 같은 해 8월 DJㆍYS의 8ㆍ15공동선언을 계기로 결집해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고 각종 성명서 발표와 기자회견 등으로 민주화 운동을 벌인다. 5공 정부는 결국 일부 정치인들에게 해금을 실시하는 등 유화정책을 내놓았고, 민추협은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려난 신민당 중진과 함께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창당하여 그 해 2월 총선에서 제1 야당으로 부상하게 된다. YS는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다가 신민당의 내각제 개헌론에 반대하여 1987년 4월 다시 DJ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1987년 6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확대를 막기 위해 물고문이 축소 은폐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국민들이 시위를 하던 중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진이 '검열'의 공포 속에서도 중앙일보 사회면에 실리면서, 이른바 6월 항쟁으로 불리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된다.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된 시위로 결국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로부터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 DJ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사면, 감형 등을 비롯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6.29 선언을 이끌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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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단일화 결렬과 낙선

1987년 7월 9일 DJ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공민권이 박탈된 지 7년 만에 사면복권이 이루어진다. 직선제 개헌으로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양김을 분열시켜 노태우를 당선시키려는 전두환의 책략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양김은 다시 분열하였고, 10월 28일 DJ는 분당을 선언하고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나간다. 결국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양김은 동시에 출마를 했고, 전두환의 절친 '보통사람'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이 된다.

 

3당 합당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가 이루어진 노태우 정권은 5공비리 청문회가 열리고 전두환이 국회에 끌려 나오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그러자 노태우는 DJ에게 힘을 합쳐 당을 같이하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DJ는 그것은 국민의 뜻이 아니라며 거절했고, 노태우는 다시 YS에게 손을 내민다. 제안을 받은 YS는 차기 집권 가능성을 담보로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함께 3당을 통합하여 현 새누리당의 모태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고 대표로 취임한다.

 

 

1992년 대통령 선거

YS와 DJ가 맞붙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누가되든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는 선거였기에

국민들은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를 기대했지만, 지역감정을 부추기고(초원복집사건) DJ에 대한 색깔론 공세 등을 펼치면서 YS는 12월 18일 제 14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DJ는 그 다음날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문민정부

군정을 종식하고 첫 민정 시대의 대통령이 된 YS는 깜짝 놀랄만한 추진력으로 업적을 남긴다. 먼저, 취임 10일만에 ‘하나회’를 기습적으로 척결한다. 12.12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노태우를 주축으로 하는 육군사관학교 11, 12기 출신의 사조직인 ‘하나회’는 군의 요직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을 순식간에 모두 경질한 ‘하나회 청산’은 다시는 군사 쿠테타가 일어날 수 없도록 만든 중요한 치적으로 평가 된다. 다음으로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여 검은 돈을 걷어내고 합리적 과세 기반을 마련했다. 또, 자신의 재산 공개를 시작으로 공직사회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공직자 재산공개’를 실시했다. 이로 인해 부정축재 의혹이 드러난 전, 현직 국회의장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장, 차관들이 해임됐다. 공직자 윤리법을 개정하여 부조리를 뿌리뽑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또 5.18특별법을 제정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했고, 일제의 잔재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했으며 4.19의거를 4.19혁명으로 격상시키고, 12.12사태를 군사쿠테타로 규정했다. 또한 핵심 국정과제로 삼은 ‘역사 바로 세우기’를 실천했다. 취임 초 YS의 지지율은 80%를 넘었다.

 

 

반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일도 많이 있다. 먼저 대북 관계에 있어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1차 북핵 위기가 파국으로 치달으며 빌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 폭격을 검토하기에 이르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과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한다. 그러나 갑자기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무산되고 만다. 당시 미국은 조문을 보냈지만, YS 정부는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조문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정상회담까지 약속했던 남북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고, DJ정부보다 더 많은 돈을 대북지원금으로 사용하고도 대화에는 참여도 못한 채 천문학적인 비용만 날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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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구제 금융 신청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세계적인 고성장 시대가 끝나가는 신호가 곳곳에 있었지만, 무분별한 대출을 규제하는 등의 선제적 대응을 하지 못한 결과 한보철강, 기아차 등의 대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외환 보유고가 급감했고 결국 국가가 부도 위기에 처하면서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량해고와 경기 악화로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임기 말 YS의 아들 김현철이 한보그룹 특혜 대출 의혹에 연루되어 현직 대통령 아들로서는 최초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 핵심 측근 최형우 전 내무무장관 아들의 대입 부정과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의 권력형 비리 등으로 지지도가 10%아래로 떨어지면서 사실상 식물정권으로 전락하게 된다.

 

YS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대도무문’, ‘정치승부사’ 등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할 수 없었을 것 같은 업적도 많다. 하지만, 집권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혀 ‘민주화 투사’가 '3당 야합'으로 한국 정치의 후퇴를 초래한 과오는 뼈아프다. 그로 인해 고착화된 지역 갈등 구조는 국민의 피로 얻어낸 대한민국의 민주주가 역행하는 동력으로 지금도 악용되고 있다.

 

87년 대선의 후보단일화 실패와 3당 합당 이후 양 김은 화합하지 못했다. 92년 대선에서 YS가 승리하고 DJ에게 승자의 아량을 베풀었다면 좋은 사이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YS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95년 정계에 복귀한 DJ는 집권을 위해서 매몰차게 YS를 몰아붙였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YS측에서 차남 현철 씨의 사면을 부탁했지만 거절했다. 두 사람의 앙금은 DJ가 병실에 입원해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일 때, YS가 "화해하자"고 말하고 나서야 풀어졌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만일 양김이 화합해서 정치를 할 수 있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87년에 서로를 인정하고 가위바위보를 해서라도 단일화를 했더라면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그랬다면 적어도 국가를 사리사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는 대통령이나 유신독재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대통령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필담으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통합(統合)과 화합(和合)’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같은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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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김의 역사를 통해 얻은 교훈이 바로 ‘통합(統合)’과 ‘화합(和合)’ 이것이라면 야당 정치인들이 이 말을 꼭 가슴속에 새겼으면 좋겠다. 아울러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YS의 유명한 명언도 함께 말이다.

 

 

Vol.48-1127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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