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버데이(Labor Day) 노동 운동 - 가려진 미국의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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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버데이(Labor Day) 노동 운동 - 가려진 미국의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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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9월 4일은 레이버데이(Labor Day), 미국의 노동절이다. 노동절은 노동자들의 권익과 복지를 보호하고 향상시키기 위해서 매년 9월 첫번째 월요일로 제정된 연방 공휴일. 특히 미국의 노동절은 역사적 의미와 함께 다른 나라의 노동절과는 조금 다른 특징이 있다. 그래서 ‘메이 데이’로 알려진 5월의 노동절과는 무슨 관계인지, 또 어떤 과정을 통해 노동절이 제정되었는지 살펴봤다. 

 

시작

미국의 노동절은 캐나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철자가 다소 다른 캐나다의 레이버데이(Labour Day) 역시 1880년대 이래 9월 첫번째 월요일이었는데 캐나다의 노동절 기원은 1872 년 토론토 인쇄 노동조합 (Toronto Typographical Union)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한 시위로 보고 있다. 1872년 3월 25일 주당 54시간의 노동을 요구하는 토론토 인쇄 노동자들이 파업하고 시위를 벌이다 주동자들 24명이 체포, 구금되자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토론토와 오타와에서 계속되었다.

 

결국 초대 총리였던 존 맥도널드 경(Prime Minister Sir John A. Macdonald)이 반노동법안을 폐지하고 구금자들을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루 9시간 노동운동(Nine-Hour Movement)’과 인쇄공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퍼레이드는 연례 행사로 이어졌고 1894년 7월 존 톰슨(Sir John Sparrow David Thompson)총리가 공식적으로 9월의 노동절을 휴일로 제정했다.

 

1882년 7월 22일 캐나다의 ‘토론토 무역과 노동 협의회(The Toronto Trades and Labour Council)’가 개최한 퍼레이드에 연사로 초청된 미국의 노동 운동가 피터 맥과이어(Peter J. McGuire)는 뉴욕으로 돌아가 9월 5일 캐나다의 퍼레이드를 본 뜬 집회를 열었다. 당시 하루 12시간씩, 휴일없이 주 7일을 일하는 열악한 근로조건에 항의하기 위해  약 만 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유니언 스퀘어에 모여 뉴욕시 거리를 행진하면서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하라는 시위를 했다.

 

투쟁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라고 우리가 아는 그 시기에 많은 일들은 힘들었고, 더럽고, 위험했다.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의 노동자의 삶은 처참했다. 사람들은 12시간 동안 초과수당, 휴가, 의료 보험과 연금도 없이 한 주에 6일 동안 일했다. 10살 정도 되는 아이가 가장 위험한 환경, 광산이나 위험한 기계가 있는 공간에서 12시간 가까이 일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월급을 얻기 위해, 조금이라도 적은 시간동안 일하기 위해, 또한 안전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869년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 의류제조공장 노동자들이 노동 기사단(Knight of Labor)을 조직했다.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조직된 미국 최초의 노동자 연합단체다. 노동 기사단이 이끈 1884년 미주리 퍼시픽 철도회사 파업은 회사의 임금삭감 저지에 성공했다. 이런 성공에 힘입어 노동 기사단은 1888년에는 6천여개 지부에 70여만 회원을 거느린 거대조직으로 발전했다. 노동 기사단은 성별이나 인종, 나이, 숙련도를 불문하고 동일 노동에 대한 동일 임금 지급과 유청소년 노동 폐지, 그리고 8시간 노동시간 쟁취 같은 목표를 세웠었는데 당시의 관점으로는 상당히 급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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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5월 1일. 시카고, 뉴욕, 보스턴 등 미국 전역에서 38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시가 행진에 나섰고 19만명이 파업을 시작했다.

 

5월 3일, 파업 농성 중인 ‘맥코믹(McCormick) 농기계 공장’에 난입한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4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 중에는 어린 소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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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4일, 시카고의 헤이마켓(Haymarket) 광장. 노동자 3,000여 명이 모였다. 나흘째 이어진 이날의 집회는 어느 때보다 긴장이 흘렀지만 시위는 그 전날 경찰에게 살해당한 노동자들을 추모하고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파업 참여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평화 행진으로 시작되었다. 다행히 우려했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밤 10시 무렵 마침 비까지 내려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들이 대부분 돌아가고 300여명의 노동자들이 광장에 남았다.

카터 해리슨 시카고 시장은 집회가 평화적이었다고 선언하고 경찰에게 집회를 평화적으로 마무리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귀가했다. 하지만 경찰 지휘부는 176명의 경찰들에게 광장에 진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경찰 병력은 곤봉으로 노동자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평화 집회’라고 항의하는 순간 누군가가 던진 폭탄이 터져 경찰 1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흥분한 경찰이 총기를 난사했다. 무차별 총격으로 경찰 6명이 동료가 난사한 총에 맞아 죽고 60명이 다쳤다. 노동자들도 4명이 죽고 7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미국 노동운동사에서 최악의 참사 중 하나로 꼽히는 헤이마켓 사건(Haymarket affair)이다.

 

폭탄 투척의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노조 지도자와 무정부주의자 8명. ‘경찰 살해에 공모했다’는 혐의가 적용된 이들은 7명이 교수형, 한 명은 종신형 판결을 받았다. 이 가운데 루이스 링(Louis Lingg)은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오스카 니브(Oscar Neebe), 사무엘 필덴(Samuel Fielden), 마이클 슈와브( Michael Schwab)는 장기수로 앨버트 파슨스(Albert R. Parsons), 어거스트 스파이즈(August Spies), 아돌프 피셔(Adolph Fischer), 조지 엔젤( George Engel) 등 4명은 1887년 11월 11일 시카고 교도소에서 교수형이 공개 집행되었다. 

 

이후 노동조건 개선 요구 집회가 갑자기 사라졌다. 주요 언론은 과격한 노동 운동을 성토하고 각주의 경찰은 노조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하거나 감시를 붙였다. 회원 수 70만 명을 자랑하던 ‘노동기사단’ 조직도 국가전복세력으로 낙인 찍혔다. 미국판 ‘공안정국’ 속에서 노동운동의 흐름도 백인 숙련공들만의 이익과 타협을 중시하는 ‘미국 노동총연맹(AFL)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1893년 일리노이 주지사 존 피터 알트겔드(John Peter Altgeld)는 복역 중이던 필덴 등 3명을 특사로 석방했다. 그는 “헤이마켓에서 있었던 폭탄 투척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고 범인이 경찰관에 대한 적개심으로 단독적으로 저지른 것”이라며 사건 관련 재판기록을 분석하여 8명의 피고가 무죄라는 것을 증명했다. 8명의 노조 지도자에 대한 유죄판결은 조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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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과 9월

1889년 7월,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해서 파리에서 20개국 대표자 391명이 참가한 가운데 국제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이 조직은 결성 당시에는 정식 명칭이 없었지만 곧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제2인터내셔널로 불리게된다. 제2인터내셔널은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정당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협동조합도 직접 참여한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노동자계급 조직이었다.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1890년부터 5월1일을 '메이데이'(May Day)로 정해 세계 노동자계급이 함께 시위 행동을 하기로 결의한다. 이것은 1886년 5월1일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의 용감하고 비극적인 투쟁을 기념하고 8시간 노동일의 제도화와 노동자상태의 개선을 위해 국제 차원에서 공동 행동을 실천하기로 한 결정이었다. 이에 따라  1890년 5월1일에 유럽 대부분 나라들의 공업 중심지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제히 거리로 나섰다.

 

시카고의 노동운동을 기념해서 생긴 ‘5월의 노동절’에서 미국은 왜 빠졌을까?여기에도 그다지 알리고 싶지않은 미국의 치부가 숨겨져 있다.

헤이마켓 사건 8년 후 또 다시 일리노이주 시카고. 이곳에는 미국 철도의 전성기인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궤도차를 생산했던 풀먼팰리스카 회사(Pullman Palace Car Company)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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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풀먼이 창업한 이 회사는 침대차를 발명했고 이 침대차들은 1980년대 까지 운행됐다. 풀먼사의 노동자들은  시카고 남쪽에 풀먼이라는 지금으로 치면 기업도시 같은 계획적 노동공동체에 거주했다. 풀먼사는 1893년부터 시작된 불황을 이유로 5,800여 종업원 중 절반 이상을 내보내고 임금을 25~40% 삭감했다. 하지만 기업도시의 사택 거주 높은 임대료는 그대로 유지했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파업(wildcat strike-노동조합의 허가 없이 노동자들의 일부가 비공인 파업을 하는 것)을 시작했는데 전미철도노조(ARU)가 이에 동조해서 1894년 5월 풀먼카 회사에서 만드는 철도차량을 사용하지 말라는 보이콧을 전개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풀먼사 파업(Pullman Strike)으로 27개 주의 250,000 명 이상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미국 최초의 산업노동조합인 미국철도조합(American Railway Union; ARU)은 기관차 화부였던  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회주의자 유진 빅터 뎁스(Eugene Victor "Gene" Debs)가 1893년 창설한것으로  전국적으로 조직된 이 파업에 27개 주에서 25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참가해서  디트로이트 서쪽의 모든 화물 및 여객 철도망이 마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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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기차들은 대개 풀먼 객차회사와 연결되어 있었기때문에 파업의 위력이 전국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연방정부가 개입했다. 당시 클리블랜드 대통령(Stephen Grover Cleveland, 22대 대통령)은 ‘연방의 우편물 운송이 차질을 빚었다’는 명분 아래 육군 병력 2,000여명을 시카고 일대에 투입했다. 존 알트겔드(John Peter Altgeld) 일리노이주지사의 공권력 개입 반대에도 연방군을 개별 사업장에 투입한 것은 위헌이라는 논란이 일었지만 법원은 ‘노동쟁의 금지 명령’을 내려 정부를 도왔다. 군 병력이 연방군과 경찰ㆍ보안관을 합쳐 1만5,000명으로 늘어나고 ARU 지도부가 체포되자 파업의 열기는 급속하게 사그러들었다. 7월 20일 연방군은 철수했고 희생자는 노동자 13명 사망과 57명 중경상. 폭동 및 태업으로 인한 피해액은 약 8천만 달러 정도였다. 파업 주동자인 데브스는 법원명령 위반 혐의로 감옥에 갔고, ARU는 해산되었다. 

 

풀먼 파업 진압 한 달 후 연방의회가 전격적으로 9월의 노동절을 국가 휴일로 지정해버린다. 하필 왜 9월일까에 대한 답은 피터 맥과이어가 뉴욕에서 처음으로 노동자들의 행진을 했던 9월 5일을 떠올리면 이해가 된다. 이렇게 급하게 노동절을 휴일로 삼은 조치는 아마도 노동자들을 달래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던 것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노동절을 5월이 아닌 9월로 정한데는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반응이 작용한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사회주의란 말만 들어도 펄쩍 뛰는 미국인들이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인 제2차 인터내셔널이 제정한 5월 1일을 노동절로 삼기는 싫었을것이다. 그리고 5월로 노동절을 정할 경우 매년 헤이마켓 사건의 상처를 헤집게 될 것을 우려한 정치권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어쨌든 9월이든, 5월이든 양대 노동절이 모두 미국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계기가 된것은 분명하다.

 

연방정부는 1894년에 제정했지만 주정부 중에서는 오레건 주가 처음으로 1887년에 노동절을 휴일로 지정했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은 주(州)마다 다른 공휴일을 일치시키는 '월요일 공휴일법(Uniform Monday Holiday Act)'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노동절이 9월 첫번째 월요일이 되었다.

 

노동자들의 오늘

군대가 나서 유혈진압을 했던 풀먼 파업은 급진적 경향을 보이던 미국 노동운동이 보수화하는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주요 노사분규에는 연방정부가 개입할 수 있다’는 선례도 남겼다. 기업인 간 결속력이 강해지고 인수합병을 통한 독점적 대기업이 탄생한 것도 풀먼 파업의 영향이다. 이래저래 미국의 노동운동 역사에 그늘을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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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의 전업 노동자 숫자는 약 1억2500만 명이다. 상위 5% 노동자 숫자는 600만 명 정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분석에 따르면 미국 노동자의 25%만이 해당 산업분야의 노동 숙련도 비교에서 글로벌 ‘톱3’에 올라 있다. 반면 45%는 하위 3위에 머물러 있다. 반면 독일은 이 비중이 비슷하다. 글로벌 톱3에 포함된 근로자 비중이 미국의 두 배에 달한다. 일본은 미국의 5배다. 한편 미국 내 각급 직장에서 노동조합 가입률은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도 과거에는 유럽 못지 않게 노동운동이 치열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난 1983년 미국 노동자들의 노조가입률은 20% 수준이었고 2013년에는 11%로 떨어졌다. 미국 대기업 최고경영자 보수는 일반 노동자의 271배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정책연구소(EPI)는 최근 미국 350대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의 지난해 보수(연봉, 보너스, 스탁옵션 실현분 포함)가 평균 1560만달러로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이는 정규직 노동자 평균 보수와 비교하면 271배나 된다. 연구소는 최고경영자 보수 배율이 특히 일반 노동자들에 비해 “여전히 매우 높다”며 이는 “경제성장의 과실이 일반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최고경영자 보수가 1978~2016년 937% 오르는 동안 일반 노동자의 보수 증가율은 11.2%에 그쳤다.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와 더 나은 노동 환경을 위해서 투쟁했던 세계 노동 운동의 출발점이었던 미국의 노동절은  이제 바베큐시즌과 여름의 끝으로 여겨 대대적인 세일을 하고, 마지막 여름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 집을 나선 미국인들이 도로를 메우는 많은 휴가 시즌들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미국만의 독특한 노동절 문화이고 노동의 의미를 되새기는 미국인들 나름대로의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오랜시간 많은 이들이 피와 땀을 흘리며 얻어낸 노동 인권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8-10-12 09:38:06 에듀인포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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