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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혁명의 붉은 별, 피델 카스트로 타계 (01)

관리자 0 350 2016.12.07 06:59

역사가 내게 무죄를 선고하리라.”

 

마지막 혁명의 붉은 , 피델 카스트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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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좌초한 듯한 작은 요트에서 82명의 남자들이 필사적으로 상륙을 하고 있었다.

‘그란마(Granma)’라는 이름이 붙은 디젤엔진이 달린 길이 18m의 허름한 이 요트는 청년들 명이 5 페소( 15000달러) 사들인 것이다.

 

승선 정원보다 7배가 많은 82명의 청년을 태우고 일주일전 멕시코 툭스판(Tuxpan) 강어귀를 떠난 그란마는 멕시코만의 높은 파도와 과적의 악조건을 힘겹게 이겨내고 마침내 쿠바 해안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들이 상륙한 곳은 당초 계획한 장소가 아니었다. 스페인과의 독립전쟁 당시 쿠바의 영웅 호세 마르티가 상륙했던 해안으로 가고 싶었지만 배가 좌초하는 바람에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동지들도 만나지 못한 엉뚱한 곳에서 상륙을 위한 사투를 벌였다. 상륙 과정에서 8명의 동지를 잃은 이들은 쿠바 남동부의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 산맥으로 향했다.

 

이동한 3 만에 이들은 바티스타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공격으로 82 60명이 죽고 22명이 살아남았다. 이중 10명은 붙잡혔고 나머지 12명은 혼자 혹은 몇몇 사람씩 뿔뿔이 흩어졌다. 12명중에는 피델 카스트로,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가 있었다.

 

그로부터 25개월 카스트로는 마침내 혁명군을 이끌고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쿠바혁명

지난 달 25일 피델 카스트로 (Fidel Alejandro Castro Ruz) 쿠바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타계했다고 주요 외신들이 쿠바 현지 언론을 인용해 일제히 보도했다. 향년 90세. 라울 카스트로(Raul Modesto Castro Ruz) 쿠바 국가 평의회 의장은 자신의 형인 피델 카스트로가 25일 밤 10시 29분 세상을 떠났다고 26일 0시가 좀 지나서 국영 TV를 통해 발표했다. 쿠바 공산주의 혁명의 상징이자 냉전 시대의 마지막 인물이었던 카스트로를 알기 위해서는 20세기 중반 쿠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 쿠바는 바티스타 독재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다. 군인 출신의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y Zaldívar, 1901-1973)는 1940년 대선에 나와 한 차례 집권한 뒤 물러났으나, 1952년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정권을 잡았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바티스타는 권력을 손에 넣자마자 언론과 의회를 통제하고 대학생들의 반대운동을 억압하면서 전횡을 휘둘렀다.

 

피델 카스트로는 1926년 스페인 출신 이주민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945년 아바나대학 법학과에 다니다가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어서는 철거민들의 생존권 투쟁을 돕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카스트로는 반미운동과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게릴라전을 시작했고, 1953년 7월 26일 오리엔테 주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에 있는 정부군의 몬카다(Moncada) 병영을 습격했다. 그러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카스트로는 체포됐다. 변호사였으므로 그는 스스로를 변론하며 역사가 자신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라는 그 유명한 최후진술을 했다.

 

“수감생활이란 두려운 협박과 사악한 고문으로 점철돼 다른 사람처럼 나 역시 힘겨워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동지 일흔 명을 살해한 저 불쌍한 독재자의 분노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유죄를 선고하시오. 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에게 무죄판결을 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징역 15년형을 받았다. 하지만 여론을 의식한 바티스타 정권은 2년 뒤 그를 사면했다. 사면 뒤 멕시코로 망명한 카스트로는 그곳에서 체 게바라(Che Guevara, 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1928-1967)를 만났다. 그리고 82명의 게릴라를 조직해 쿠바로 다시 돌아온 때가 1956년이었다. 쿠바 상륙 직후 바티스타군의 매복공격을 당해 12명만 살아남은 원정대가 자리를 잡은 곳은 산티아고 데 쿠바의 산악 지역 시에라 마에스트라였다. 여기서 카스트로의 게릴라전이 시작됐고 2년 만에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켰다. 혁명의 주역이었던 체는 쿠바에서 국립은행 총재, 산업장관 등을 역임했다. 카스트로에 이어 2인자였다. 하지만 그는 권력 안에 머물지 않았고 1965년 아프리카 콩고로 가 다시 혁명에 뛰어들었다. 1년 뒤에는 볼리비아에 잠입했다가 1967년 체포돼 처형됐다.

체의 죽음이 확인되자 카스트로는 애도 연설을 하며 “우리의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라고 묻고는 “우리는 체처럼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1997년 발견돼 32년 만에 쿠바로 돌아온 체의 유해는 아바나에서 그의 전적지 산타클라라로 옮겨졌고 그 장면은 전국에 TV로 생중계 됐다.

 

서거 다음 날인 지난 26일 화장된 카스트로의 유해는 같은 날 오전 트레일러를 후미에 단 초록색 러시아제 군용 지프 차량에 실려 아바나 혁명 광장을 떠났다.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한 후 4일 쿠바 동부에 있는 제2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에 도착,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에 안장된다.

'혁명의 도시'로 불리는 산티아고 데 쿠바는 카스트로가 유년과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이며 산티아고 시청 발코니에서 쿠바혁명 성공을 선언하기도 했다. 운구는 카스트로가 산티아고에서 혁명의 기치를 높이 쳐든 후 1959년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 때까지 지나온 길을 거꾸로 짚어가는 여정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엇갈리는 평가

카스트로의 사망 뉴스가 나오자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근처 리틀 아바나는 축제 분위기였다.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는 200만명에 달하는 쿠바계 미국인들 가운데 140만 명이 살고 있는 미국 내 최대 쿠바 이민자 커뮤니티가 형성된 곳이다. 과거 쿠바인들은 독재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세계 각국의 반응도 양쪽으로 나뉘었다. ‘제3세계’ 소속 지도자들은 우호적인 논평을 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트위터에서 카스트로가 “20세기를 상징하는 인물들 중 하나”라며 “인도는 위대한 친구를 잃은 것을 슬퍼한다”고 밝혔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을 통해 “중국 인민은 진정한 동지를 잃었다. 카스트로 동지는 영원히 살아갈 것”이라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서구 지도자들 역시 추모를 전하면서도, 카스트로의 죽음이 상징하는 ‘변화’를 언급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카스트로의 죽음을 애도하며 “외부 지배를 거부하는 쿠바인의 자부심을 대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지만 “혁명기의 희망과 그 이후의 실망”을 모두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6일 백악관 성명을 통해 “역사는 한 인물이 그의 주변 사람들과 전 세계에 미친 엄청난 영향을 기록하고 판단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카스트로 타계를 계기로 미국과 쿠바의 관계 개선을 희망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전 세계는 자국민을 거의 60년간 억압했던 야만적인 독재자의 타계를 목격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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