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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혁명의 붉은 별, 피델 카스트로 타계 (02)

관리자 0 395 2016.12.0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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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혁명에 성공한 카스트로는 쿠바를 사회주의 국가로 선언했다. 지난 1902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여전히 미국에 종속돼있던 쿠바의 경제 구조를 바꾸기 위해 그는 1959년 5월 17일 제1차 농지개혁법을 공포했다. 당시 쿠바 농경지의 대부분은 사탕수수 작물 재배를 위해 미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는 이러한 미국의 대농장 시스템을 해체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외국인들의 농지 소유를 제한한 조치에 농민들은 환호했고, 1961년에는 미국의 기업을 국유화하고 집단 농장을 만들면서 경제적인 독립을 추진했다. 이와 함께 카스트로는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시스템을 구축했다. 집권 이후 빠른 속도로 학교를 건립해 50%가 넘나들던 문맹률을 4% 안팎으로 떨어뜨렸다. 

 

또 무상으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현재까지도 쿠바의 의료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토지개혁을 통해 국민에게 토지를 돌려주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권력을 잡은 카스트로는 점차 소련의 스탈린 체재를 본뜬 일당 독재 정권을 세우고, 정부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그가 쿠바를 해방시키려고 탔던 작은 보트는 그를 피해 쿠바를 떠나는 사람들의 수단이 되었다. 반미주의자였던 카스트로는 그는 1960년 혁명광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1차 '아바나 선언'을 발표했고 미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 고작 169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미국의 골칫거리가 자리잡은 것이다. 1962년 발표된 2차 아바나 선언에서는 남아메리카에서의 미국의 침략 행위를 탄핵하고 전 대륙의 해방을 요구했다.

 

1960년 말까지,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신문사들이 폐쇄되었고 모든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국은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마이애미로 망명한 쿠바 반체제 인사들의 주장에 따르면 온건주의자, 교사, 교수들은 숙청되었으며 어떤 한 해에는 약 2만여명의 반대파들이 비인간적인 투옥 조건에서 구속되고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피델 카스트로는 총리, 공산당 제1서기, 국가평의회 의장을 연이어 맡으며 쿠바를 이끌다가 건강 문제로 2006년 친동생 라울에게 정권을 넘겼다. 2008년엔 공식 직위에서 완전히 물러나면서 반세기 동안 지켜온 권좌에서 내려왔다.

  

“조국, 아니면 죽음을”

피델은 미국으로부터 수많은 암살 위협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올림픽 종목에 암살에서 살아남기가 있다면 내가 금메달을 땄을 것”이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는데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26일 카스트로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린 미국의 끈질긴 암살 시도의 뒷이야기를 소개했다.

 

카스트로는 모두 638차례의 암살 위협을 당했다. 이 숫자는 쿠바 비밀정보국 수장(首長)을 지냈던 파비안 에스칼란테가 1996년 발간한 ‘암살계획-카스트로를 죽이는 638가지 방법’에서 나왔다. 이를 바탕으로 영국의 공영방송 채널4가 2006년 ‘카스트로를 죽이는 638가지 방법’이란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뒤로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카스트로 스스로도 수 많은 암살 위기를 넘겼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카스트로 암살 시도 자체를 부인해오다 1975년 미 상원 특별위원회에서 CIA가 60~65년 사이 8차례 암살 공작을 벌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 마피아들도 카스트로 암살 공작에 가담했다. 영화 ‘대부 2’가 그렸듯이 마피아는 쿠바의 카지노와 유흥 산업에 이권을 갖고 있었는데, 공산화로 이를 다 잃었기 때문이다. CIA도 노출을 우려해 마피아를 통해 암살 공작을 실행하는 걸 선호했다고 한다.

  

암살 계획의 단골 소재는 담뱃잎으로 말아서 만든 시가였다. 시가 마니아인 카스트로에게 폭탄이 장착된 시가를 건네 그의 얼굴을 날려버리겠다는 시나리오였다. 독극물을 묻힌 시가를 활용하는 계획도 있었다. 하지만 시가를 이용한 암살 시도는 1985년 카스트로가 금연을 선언하면서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카스트로의 여인으로 알려진 이가 동원된 아침드라마 같은 작전도 있었다. 19세에 카스트로를 만나 그의 아이를 임신했던 마리타 로렌즈는 누군가에게 납치된 뒤 강제 낙태를 당한다. CIA는 복수심에 불타던 그녀에게 성공 보수로 200만 달러를 약속하면서 “화장품 통에 독이 든 알약을 숨겨 카스트로를 죽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는 호텔방에 들어선 카스트로에게 암살 계획을 털어놓았고 카스트로는 권총을 쥐여주며 “나를 죽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차마 쏘지 못했다고 한다.

 

638이라는 수는 과장된 수치라는 말도 있다. 실행되지 않은 아이디어까지 모두 포함한 숫자라는 것이다. 어쨌든 카스트로 암살은 CIA의 흑역사인 셈이다. 이후 카스트로는 살아남기 위해 혼자 거리를 돌아다니던 습관을 없애고 자신처럼 변장한 ‘가짜 카스트로’를 활용해 암살단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또 쿠바 내에만 20곳의 거처를 두고 여기저기 자주 옮겨 다녔다고 한다.

 

반대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암살에 카스트로가 개입했다는 의혹도 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인 리 하비 오스왈드의 배후에 쿠바와 카스트로가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다큐멘터리 감독 빌프리트 휘스만의 ‘케네디와 카스트로, 그 운명의 승부’에 따르면 케네디 암살은 케네디와 CIA에 대한 카스트로의 보복 행위였고, 오스왈드는 지적이고 냉철한 반체제주의자였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케네디의 후임자 린든 존슨 대통령은 카스트로 개입 사실을 알았지만 전쟁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봉합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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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세기가 바뀌고 시대는 변했다.

미국과 쿠바는 2014년 12월 53년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2015년 8월 아바나 주재 미국 대사관이 재개설됐고, 올해 2월 두 나라를 오가는 정기 항공노선까지 생겼다. 이어 3월에는 쿠바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과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 간의 미-쿠바 정상회담이 88년만에 이뤄졌다. 비록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예측할 수 없게 되었지만 피델 카스트로는 생전에 그의 전성기였던 냉전시대의 마지막 장면을 지켜본 것이다.

 

그는 지난 4월 아바나에서 열린 쿠바 공산당 제7차 전당대회 폐회식에 참석해 “나는 곧 아흔살이 된다. 곧 다른 사람들과 같아질 것이며, 시간은 모두에게 찾아온다”며 자신에게 곧 다가올 죽음을 암시하는 사실상의 고별사를 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혁명의 아이콘이자 아디다스 운동복(츄리닝) 마니아(덕후)였던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가 그의 바람대로 역사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은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시간만큼 어쩌면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역사의 판결이 내려질지도 모른다. 지금 분명한 건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52년 2개월 혹은 49년 5일) 집권한 지도자,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암살 표적이 된 인물 그리고 1960년 9월29일 유엔에서 4시간29분 동안의 발언으로 유엔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사람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다양한 세계 기록보유자라는 것이다.

 

 

 

로이스 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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