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문학의 교황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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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문학의 교황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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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Marcel Reich-Ranicki; 1920년 6월 2일 - 2013년 9월 18일)는 폴란드 태생의 독일인 문학비평가이자 문학회 ‘그루페 47(Gruppe 47)’의 회원이다. 그는 독일 문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로, 독일인들은 그를 문학교황으로 칭한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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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한국의 한 TV 예능프로그램에서 독일의 문학 비평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다. 노벨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일지라도 내용이 형편없으면 가차없이 비판을 한다는 독일의 비평 문화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 노벨상 수상 작가는 <양철북>을 쓴 ‘귄터 그라스’ 였고, 그의 작품 <광야>를 신랄하게 비판한 비평가는 독일에서 ‘문학의 교황’이라고 불리던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였다.

 

1995년 8월 21일자 <슈피겔>의 표지에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책을 찢는 사진이 실렸다. 막 발간된 ‘귄터 그라스’의 <광야>를 두 손으로 찢는 합성사진이었다.

<광야>를 “전적으로 실패한 작품, 완전한 졸작”이라고 혹평한 그의 판단과 표현은 단호 했고 가차없었다. ‘귄터 그라스’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와 작품에 대한 그의 판단이 그러했고, 그런 그는 당연히 적이 많았다.

 

※ 슈피겔(Der Spiegel): 독일어로 ‘거울’ 이라는 뜻을 가진 독일 최고 권위의 시사주간 잡지. 서독의 ‘타임’지로 불렸다. 수많은 특종기사와 권력에 대한 비판적 논조로 독일 지도층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유력지로 꼽힌다.

 

후일 ‘귄터 그라스’는 ‘라이히라니츠키’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화해를 시도했지만, ‘라이히라니츠키’는 자신의 판단을 바꾸는 것을 거부하고 끝내 ‘귄터 그라스’가 내미는 손을 잡지 않았다. 

그의 판단은 언제나 분명했다. 그러나 혹평이든 호평이든 그가 언급하는 책들은 더 잘 팔렸다. 판매량만을 생각한다면 그가 언급하지 않는 것보다 혹평을 해주는 쪽이 훨씬 나았다.

 

하지만, 혹평을 받고 본의 아니게 ‘라이히라니츠키’의 적이 된 작가들도 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혹평에는 갈구하던 것을 찾지 못한 사람의 실망이 담겨 있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비평은 어떤 외적인 요소에도 굴하지 않고 철저하게 공정하고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고, 그는 이런 확신을 누구보다도 더 엄격하게 실천한 ‘문학비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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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교황>

 

1920년 6월 2일 폴란드에서 태어나 1929년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한 그는 독일의 모순과 이중성을 경험하며, 김나지움(독일의 중등교육기관)시절 독일의 문학, 연극, 음악 등에 심취했다.

 

대학에 가기 위해 아비투어(Abitur)를 치렀지만 1938년 10월 독일 제3제국(나치독일)의 유대인 탄압에 의해 12,000명이 넘는 폴란드계 유대인들과 함께 강제 추방당하여 바르샤바 게토에 수용된다.

1943년 트레블링카 강제수용소로 이송되기 직전 아내와 함께 게토에서 탈출하여 바르샤바 외곽 폴란드인 부부의 집에서 숨어 지내다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폴란드군에 자원입대하여 정보국과 외무부 등에서 근무했다. 

폴란드 공산당에 가입하고 런던 주재 폴란드 영사관에서 영사로 일하던 시절, ‘제국’이라는 뜻을 가진 ‘라이히(Reich)’라는 성의 뉘앙스 때문에 ‘라니츠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49년 귀국하였으나 스탈린 독재 체제하에서 당 노선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감되었고, 1950년 정보국과 외무부에서 해고되었으며 공산당에서도 축출되었다. 이후 바르샤바에서 독일문학 편집자, 서평가, 비평가로 활동하다가, 1958년 여행을 가장하여 가족과 함께 서독으로 망명한다.

 

‘그루페47’에 참여해 현대 독일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1960년부터 1973년까지 <디 차이트>의 고정 문학평론가, 1973년부터 1988년까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문학부 책임자로 일했다. 

독일을 대표하는 문학비평가로 명성을 얻은 그는 1988년부터 2002년까지 독일 제2공영방송(ZDF)의 서평 프로그램 <문학 4중주>를 진행하면서 문학의 대중화에 앞장섰고, 권위를 타파하는 거침없고 명쾌한 비평으로 문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명실상부 ‘독일 문학계의 제왕’, ‘문학의 교황’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를 가리켜 독일의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우리에게 읽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 ‘그루페 47’은 1947년 ‘알프레드 안데르쉬’와 ‘한스 베너 리히터’가 창립한 서독의 문학(작가, 비평가)단체로 미국에 전쟁포로로 잡혀 있던 독일 작가들이 무너진 독일 문학의 전통을 재건하겠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들은 나치의 선전문구 등이 독일어를 부패 시켰다고 생각하여 과장과 시적 만연체를 배제한,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서술적 사실주의를 옹호했다. 매년 수여하는 ‘그루페 47’상은 작가에게 커다란 문학적 명예를 안겨주고 있는데 이 상의 수상자로는 <양철북>의 ‘귄터 그라스’, <여인과 군상>의 하인리히 뵐, <유예된 시간>의 ‘잉게보르크 바하만’ 등이 있다.

 

1960년부터 2000년까지 40년 동안 무려 8만 권이 넘는 책을 비평한 그는 2013년 9월 18일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아내와 나란히 프랑크푸르트 납골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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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평가의 죽음>

 

2002년 7월 독일 보수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마르틴 발저’는 <어느 비평가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악평에 분개한 작가가 평단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유대인 비평가를 살해한다는 줄거리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유대인 비평가가 ‘라이히라니츠키’를 떠오르게 한다는 점 때문에 독일 문단 안팎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발저’를 비판한 반면, ‘귄터 그라스’는 ‘발저’ 편에 섰다. 2012년 ‘귄터 그라스’가 발표한 이스라엘 비판 시 <말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 ‘라이히라니츠키’는 “혐오스럽다”고 일갈 했었다.

 

‘라이히라니츠키’는 자서전 <나의 인생, 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에서 나치의 수용소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부모가 가스실로 끌려들어가며 이별하게 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귄터 그라스’처럼 정치적 관점을 가진 문인들에게 더욱 보수적인 관점을 보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유년시절의 경험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광야>에 대한 비판도 ‘귄터 그라스’의 소설적 기법을 비판 했다기 보다는 소설에서 드러난 독일 통일에 대한 ‘귄터 그라스’의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봐야한다는 견해도 있다. 물론 진실은 ‘라이히라니츠키’만이 알 것이다.

 

<주례사 비평>

 

이른바 ‘주례사 비평’이라 불리는 칭찬 일색의 서평 때문에 우리나라의 문학이 죽어간다고 개탄하는 내용을 TV 예능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작품에 대한 엄격하고 공정한 판단보다는 칭찬일변도의 비평을 함으로써 비평이 광고가 되어버리고 작가와 비평가들이 권력 집단을 형성하는 곳에서는 절대로 문학이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단 문학뿐만 이겠는가. 드라마, 영화, 음악, 연극 등 이 시대에 유통되는 모든 문화 작품들이 ‘주례사 비평’ 아니, ‘비평을 빙자한 광고’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고 제작하는 출판사와, 그 책을 유통하고 배급하는 온·오프라인 서점과 유통업체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책들에 대해 기사를 쓰는 언론들은 오랜시간동안 매우 공고한 공생관계를 유지해왔다. 다른 문화산업의 구조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한국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신작을 내놓았다면 비평가들은 과연 그 공고한 산업구조가 지키고자 하는 ‘돈 줄기’와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라는 ‘국뽕’에 취한 대중들의 집단의식을 과감히 거스르고 냉정하고 신랄한 비평을 내놓을 수 있을까?

 

지금 우리에게 ‘문학계’뿐만 아닌 그 어디에라도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같은 ‘어떤 외적인 요소에도 굴하지 않고 철저하게 공정하고 독립적이면서도 대중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비평가’가 존재하는가?

 

 

<다름, 비판, 관용>

 

우리는 최근 건전한 비판에 귀를 닫은 정권이 세상을 얼마만큼이나 망쳐놓을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다행히 건강하고 수준 높은 시민의 힘으로 정권교체를 이루어 냈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기 위해 ‘블랙리스트’같은 것을 만든 자(者)들이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그 ‘블랙리스트’에는 대한민국의 ‘라이히라니츠키’들이 여러 명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다름’은 매력적일 수도 있고 때로는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날 때부터 서로 ‘다른 채’로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 다름이 모여 새로운 다름을 만들어내면서 세상은 발전하게 된다.

 

발전을 위한 건전한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 비판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처럼 공정하고 명료해야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할 수 있어야한다. 때로는 혹독하리만큼 아플 수도 있지만, 발전을 위한 건전한 비판이 자유로운 관용의 사회를 꿈꾸며, 독일 문학계에 깊은 족적을 남긴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Vol.128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8-10-12 09:38:21 에듀인포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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