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를 방문한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유가족 - 윤민이, 재욱이 어머니

에듀라이프

LA를 방문한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유가족 - 윤민이, 재욱이 어머니

관리자 0

LA를 방문한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유가족

윤민이, 재욱이 어머니

 

eac1490133b4aa5930866a2eec5a058c_1477593450_63.jpg
 

 

지난해 4월 16일,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 325명을 포함해 총 476명을 태운 인천발 제주행 연안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이 사고로 295명이 사망했고, 한 달 후면 참사 1주기를 맞는 지금까지도 9명이 실종자명단에 올라있다.

 

스스로 탈출한 소수 인원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의 생명도 구하지 못한 구조 및 수색 작업은 피해자 가족들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지켜보던 많은 국민들에게 큰 실망과 충격을 안겨주었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보인 구조 당국과 대한민국정부의 태도, 그리고 권력에 굴종한 언론의 보도 행태는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오열하던 가족들을 또 한번의 충격과 갚은 배신감에 빠뜨렸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국민이었던 그들은 하루 아침에 유가족이란신분이 되어, 사랑하는 가족을 가슴속에 묻지도 못한 채, 지금도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진상규명을 호소하고 있다.

 

LA를 방문한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유가족인 윤민이 어머니와 재욱이 어머니를 만났다.

(3월 4일에 열린 세월호 유가족들의 육성 기록을 담은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 북 콘서트와 3월 6일 미주 최초로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 시사회에 앞서 가진 인터뷰, 그리고 시사회 후 관객들과 가진 간담회의 내용을 함께 엮었다.)

 

▲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픈 상처를 되짚는 인터뷰나 간담 회가 참 힘드실 텐데요.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줄수록 저희는 좋아요. 더 많은 분들에게 알려야 하니까요.

솔직하게 말씀 드려서 정말이지 힘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감정 조절이 잘 안되고, 너무 슬프고, 아프고 그래서, 많이 힘들었는데, 그 과정이 좀 지나니까 연단이 되고 책임감, 정의감, 막 이런 게 불타오르는 거에요. ‘아,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하고 알게 되고, 또 그것이 바로 소통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게 됐죠. 그래서 많은 분들을 만날수록 더 힘이 납니다.

 

▲ 힘드시겠지만, 사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놀래서, 또 억울하고 분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뉴스에서 전원구조라고 했는데 재욱이와 통화가 안 되는 거에요. 내려가는 길에 뉴스가 나왔죠. 오보라는 거에요. 

 

진도 체육관에 도착했는데 생존자 명단에 우리 아이가 없었어요. 반별로 생존자 명단이 적혀 있었는데, 우리 재욱이 반인 2학년 8반에는 단 두 명이 적혀 있었어요… 곧바로 팽목항으로 달려갔는데 그야말로 거긴 아수라장이었어요.. 그때부터 지옥 같은 시간이 시작된 거죠. (한숨)

 

3일째까지도 전혀 구조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완전히 속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죠. 첫 날이 그냥 지나가고, 이튿날 해경이 구조 작업을 하고 있다고 브리핑을 하는데 너무나 이상한 거에요.

700명을 투입해서 구조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물에서 나온 애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요.

이튿날 대통령도 왔었죠. 대통령이 직접 방문하셔서 ‘정부가 최대한 지원을 해서 철저하게 구조작업을 하겠다. 철저한 조사와 원인 규명을 하겠다.’ 이렇게 저희한테 약속을 하고 가셨어요.

그런데 대통령이 가시고 구조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아이들이 올라와야 되는데 너무 조용 했어요. 돌아오는 해경 배도 없었고, 구조되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거에요. 다들 그 아수라장에서 그저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죠... 그런 상황이 계속된 거에요. 대통령이 오고 나서 변한 건 스크린이었어요. 체육관에 큰 스크린을 설치 하고 방송 3사에서 생방송을 하고있다고 계속 방송을 틀어줬는데 그때는 몰랐어요, 똑같은 구조작업이 계속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게 3일째까지는 구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해경청장과 해수부장관이 팽목항에 사고 대책본부라고 책상을 놓고 앉아서 매일 구조를 하고있다고 브리핑을 하는데, 구조되는 아이는 하나도 없는 거에요. 5일째던가 제가 질문을 했어요.

그땐 이미 골든 타임도 지났고, 배가 바닥까지 완전히 가라 앉았대요. 300명을 이끌고 수장이 된 거죠. 심해 50미터까지 가라 앉은 배에 만일 생존자가 있다고 해도, 그대로 올라오면 폐가 터져서 죽는대요. 25미터에서 반드시 쉬어야 한답니다. 생존가능성이 없다고 직감을 했고, 아이들이 부패가 시작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서 제가 물었어요. “청장님. 생존자가 있다고 칩시다. 잠수부 2명이 들어가서 생존자를 찾게 되면 잠수복을 입히고,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밖으로 데리고 나올 장비가 있습니까? 그런 장비를 가지고 내려갑니까?” 그랬더니, “장비 없습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때 부모들이 난리가 났어요. 책상을 다 뒤엎고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너희들, 죄다 거짓말이니 믿을 수가 없다. 청와대로 가겠다” 그러고는 밤새 걸어서 새벽에 진도 대교에 도착한 거에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경찰들이 막았어요. 못 간대요. 우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경찰 병력이 왔대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날 아침에 전화가 왔어요. “누구누구 아빠 계십니까? 누구누구 엄마 계십니까? 아이들이 올라오기 시작했으니까 아이들을 데리러 오십시오. 그러자 그 부모들이 팽목항으로 아이들을 데리러 가면서 와해가 된 거죠. 저희는 정말 아직도 모르겠는 게, 팽목항에서 바지선까지 가는데 한 시간 반이 걸리거든요. 그런데 올라온 아이들이 상태가 다 달랐어요. 구명 조끼를 입고 온 아이들, 축축하게 젖은 아이들, 금방 잠든 것 같은 아이들, 상처가 있는 아이들,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아이들.. 굉장히 다양했어요. 갑자기 아이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구조를 한 건지, 아니면 부유되는 아이들을 바지선에 건져 놓고 그 난리를 치니까 그제서야 데려 왔는지 저희는 알 수가 없죠. 아무튼 구조 작업을 했던 해경들은 아무도 양심 선언을 하지 않고 있고, 총 책임자였던 123정의 정장은 1심 재판에서 징역 4년을 받았어요. 이것은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학살인데도요.

 

eac1490133b4aa5930866a2eec5a058c_1477593559_49.jpg
 

 

▲ 재욱이는 며칠 만에 돌아 왔나요? 마지막 모습은 어땠는지요?

 

재욱이는 딱 일주일 만에 엄마 곁으로 올라왔어요. 다시는 들추고 싶지 않은 모습인데... 비교적 깨끗한 모습으로 올라왔어요. 이마에 조금 패인 상처가 있고, 손발은 약간 불어 있었구요… 튼튼한 꿀벅지와 넓은 어깨는 여전했는데, 표정은 ‘아… 엄마한테 와서 다행이다. 엄마를 만나서 참 다행이다... 엄마~’...... 그런 표정으로… 살짝 웃는 표정으로 올라왔어요... 아마도 제 마음이었겠죠… 아들을 그렇게 맞이하고 싶은 제 마음이었던 같아요.

 

▲ 사건 이후로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셨나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기 위해 광화문으로, 청운동으로, 국회로, 팽목항으로 쫓아다니느라고 1년을 정신없이 헤매고 다녔어요. 그러다 겨울이 되어 그 차가운 바닷물을 느끼게 되니까 속이 다 녹아 내렸어요. 유가족들이 다 똑 같은 마음이었을 거에요.

유가족들은 삶을 이어 나가는 것이 힘든 사람이 많았어요. 저도 그랬어요. 길을 가다가 차가 우회전을 해서 씽~하고 들어 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나를 내던진 거에요. 차가 끼~익! 하고 급정거를 하더라구요. 눈물이 났어요. 내가 한 순간에 나를 버리고, 그냥 ‘이렇게 살면 뭐해.....’ 그러는 거죠. 그러면 안 되는데, 생명이라는 것은 소중한 거잖아요... 자살 같은 거 생각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내 삶을 운영하는 게, 삶을 살아간다는 게 굉장히 힘들고 무거워요. 노래를 들어도, 예쁜 꽃을 봐도 눈물만 나요. 사진 보다가 울고, 길 가다가 울고, 밥 먹다가도 울었어요. 웃고있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 너무 낯설고 나만 뚝 떨어져 혼자가 된 것 같아요. 우리 아들 재욱이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까요? 무슨 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까요? (울음)

 

지금 세월호 유가족들이 다 이런 과정을 겪고있어요. 유가족들은 모두 마루타 같아요. 전대미문의 참사를 겪었지만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것을 해결해 줄 책임자가 없었어요. 304명의 가족이면 곱하기 3이나 4만 해도 천 명이 넘잖아요, 여기에 학교 아이들, 지역주민들, 많은 국민들까지 그 수를 가늠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었는데, 이런 트라우마를 치유해주거나 해결해줄 수 있는 기관이 전혀 없는 거예요. 

 

사고를 겪은 유족들이 당시에 어땠고, 지금까지 어떤 과정을 겪고 있는지가 ‘금요일엔 돌아오렴’에 기록되어 있어요. 마루타인 저희들의 중간 기록인 거죠. 이 책은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책을 사서 열어보지도 못했다고 하시구요, 어떤 분은 이를 악물고 두 세 번을 읽으셨다고 해요. 세월호의 진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이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시더라도 꼭 읽어주세요. 우리가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 가야할지, 앞으로 무엇을 우리가 조명하며 살아가야 할지 숙제를 풀어줄 책입니다. 꼭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재욱이는 어떤 아이였고, 어떨 때가 가장 생각이 나시나요?

 

아침에 눈뜰 때.. 밥 먹을 때... 잠들려고 할 때... 숨쉴 때... 매 순간 순간… 아들이 제 세포 속에 녹아있기 때문에… 느껴져요 .... (울음)

수학여행 가는 날 아침,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엉덩이를 실룩실룩 거리면서 함박웃음으로 뛰어 나가던 모습이... 마지막이었어요. 그러고는 일주일 만에 그 아이가 주검으로 돌아왔어요. 인정이 안되죠. 아직도 인정이 안돼요...

 

재욱이는 굉장히 건강하고 든든한 녀석이었어요. 운동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그 아이 꿈이 환경 조경사였어요. 친구를 좋아하고, 학원을 안 다녀도 공부도 상위권에 들었구요, 신체도 정신도 아주 건강한 아이였어요... 누나 하고는 한 살 차이기 때문에 18 년을 서로 의지하면서 친구처럼 성장했던 아이들입니다. 재욱이는 제가 에너자이저라고 표현 했었어요. 그렇게 에너지가 충만했고, 그 에너지를 한껏 쓰면서 자기의 꿈을 그려갔던 아이에요. 아빠한테는 건강한 대들보였겠죠. 장손이었어요. 그리고 엄마한테는…… 솔직히 말하면 아빠보다도 더 훌륭한 애인이었습니다. 그런 아이가 하루 아침에 사라졌으니……

 

4월 16일 날 재욱이가 가면서 엄마인 저도 함께 갔습니다... 표현하기 싫지만... 저도 함께 죽었습니다… 근데, 이 아이가 왜 갔는지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는 알아야죠. 한 번 죽은 엄마는 두 번 죽는 거, 세번 죽는 거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세월호의 아이들이 부활해서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지 지켜보시면 아시게 될 거에요. 늘 지켜봐 주시고, 함께 해주세요. 다음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안전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 윤민이는 어떤 아이였나요?

 

저는 딸만 셋 이에요. 맨 위가 25 살, 둘째가 23살, 윤민이가 막내에요. 18살. 아이들 아빠가 외아들이라서 아들을 원해서 늦게 더 낳았는데 딸이었던 거죠. 

 

저희 집은 뭐든지 윤민이 위주로 돌아갔었어요. 외식을 해도 윤민이가 메뉴를 정했고, 집에서도 윤민이가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고 하면 된장찌개가 그날 저녁 메뉴가 되는 거고, 다 그런 식으로 온통 윤민이 위주로 돌아갔던 거죠. 그런데 이제, 4월 16일 이후로는……(한숨) 

 

예전 같은 일상이 저희 집엔 더 이상 없어요. 윤민이는 막내 인데도 참 얌전한 아이였어요. 제가 직장을 다녀서 큰 언니가 윤민이를 많이 돌봐줬는데, 지금 큰 애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세월호 사건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어요. 또 세월호 사고를 당한 아이들의 형제, 자매 아이들을 찾아서 같이 밥도 먹고 돌보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어요. 사고 이후로 저희 집은 완전히 180도 다른 삶을 살고 있죠. 예전에는 윤민이 대학등록금이라도 벌라고 제가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이제는 그 이유가 없어졌잖아요. 지금은 윤민이를 위해서 이렇게 지방을 또, 해외를 다니게 됐네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삶이 되었어요. 

 

▲ 어떤 때에 윤민이가 많이 생각 나시나요?

 

아무래도 생일이나, 명절이나 이런 날은 유난히 더 윤민이 생각이 나죠. 얼마 전에 설날이 지났잖아요. 제가 한복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설날이면 항상 온 가족이 한복을 입었어요. 제가 결혼한지 24년째인데 한 번도 한복을 입지 않은 설날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못 입겠더라구요. 윤민이가 한복을 너무 좋아 했어서... 차마 입지를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올해는 한복도 못 입고 친정 나들이도 못했어요… 그런데 앞으로도 못 입을 것 같아요. 영원히…

윤민이 없이 우리끼리는 못 입을 것 같아요...(울음)

 

▲ 미국에 방문하시게 된 과정과 방문하신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국내에서는 이런 간담회를 꽤 오래 해오고있었고, 여기 계시는 분들도 SNS 등을 통해서 그 사실을 많이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유가족을 초청하고 싶다는 연락을 이미 오래 전에 하셨대요. 그래서 유가족대책위원회에서 여러가지 사정을 고려하며 준비를 하다가 이번에 일정이 잡히게 된 거죠. 

다음달이면 참사 1주기가 되는데 우리는 아직까지도 100가지가 넘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참사가 일어나는 지부터 그 참사를 수습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 하나도 없이 아직도 온통 의혹들뿐입니다. 그래서, 피해자인 유가족이 거리로 나올 수 밖에 없었고, 지구 반대편 LA까지 올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여러분들께 말씀 드리고, 세월호 사건을 교훈 삼아서 두 번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저희는 유가족이지만) 대한민국 국민뿐 아니라 멀리 해외 동포 여러분과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분들이 이 숙제를 함께 풀어가 주셨으면 하는 저희의 바람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LA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 미국 방문을 결정하실 때 어떤 망설임이나 두려움 같은 건 없으셨나요?

 

전혀 없었어요. 간담회의 목적이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최대한 많이 알리는 것이잖아요. 누가 가도 가야만 하는 상황이고, 이미 모두가 그런 마음을 먹고 움직이기 때문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어요. 다만, 초청해주신 분들께 우리가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를 고민했죠. 저희에게 실망하시는 건 아닐까... 저희가 말을 잘하는 전문가가 아니거든요, 평범한 엄마들이잖아요.

그런데 고민 끝에 그냥 저희를 만나서 격려해주고, 안아주고, 힘을 주고 싶으신 거구나 하는 결론을 얻었죠. 그러면 우리도 힘을 얻어갈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결심을 했죠. 저희 보고 미국에 가서 힘 많이 얻고 돌아와서 전해 달라고 다른 부모님들한테 부탁을 받았어요.

세월호 사건은 해외 언론들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세계적인 사건이잖아요. 팽목항에서도 외신기자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인터뷰를 하면 국내 언론에는 오보가 나가지만 해외언론에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보도되었죠. 그래서 신뢰가 있었어요. 

 

일본에서 처음으로 초청이 왔어요. 그래서 다른 부모님들이 다녀 오셨고, 하지만 사실, 정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이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계시는 미국이잖아요. 다음은 캐나다고요. 그 다음엔 독일이나 다른 쪽도 잡혀있는 상황이에요. 아프리카라도 초청이 오면 갈 거에요. 부모들이 이렇게 다니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지만, 그것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은 하나도 없어요. 지구 끝까지라도 가는 거죠. 그 뒤에는 우리 아이들이 있으니까요. 저희는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들이에요. 고민하거나 망설일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 이번 사건에 대한 정부나 정치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실망이 크시겠지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죠. 기대는 없어진 지 오래고요. 여당뿐만 아니고 야당도 마찬가지에요. 야당이 어떻게 착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청운동에서는 정말 조용히 하면 부모님들의 흐느낌 소리가 청와대에 들릴 것 같은 거리였어요. 그런데 끝까지 외면당했죠.

 

어미 소가 새끼 소를 잃고 울부짖으면 어미 소가 충분히 울고 울고 또 울어서 그 한을 다 풀 때까지 그냥 둔답니다. 저 같으면 맨발로 뛰어 나와서 다독거려줄 것 같아요. 그 공감대가 왜 형성이 안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언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책임은 언론에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전원구조라는 오보 때문에 구조를 할 수 있는데도 그냥 돌아간 인원들이 굉장히 많고요, 그 오보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그것에 대한 책임은 아무도 지지않고, 왜 오보가 나왔는지에 대한 이유도 드러나지 않고 있죠. 정부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나중엔 바로잡아야 되는 거잖아요. 양심 선언을 하지 않고있는 언론이 제일 큰 문체인 거죠.

정권이나 권력은 시간이 지나면 자라지는 것이지만, 한 시대를 책임지고 기록해서 역사에 남기는 것이 언론이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가장 기본적인 자기의 책무를 무시했다고 봐야죠. 직무유기에요. 2014년의 언론은 직무유기로 반드시 지탄을 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끄럽잖아요. 역사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언론인으로서. 빨리 자각하고 깨어나야죠. 카메라로 촬영하고 기록은 뭐 하러 합니까? 지금은 조선시대도 일제시대도 아니고 SNS로 말 한마디가 위성을 통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세상인데 왜 침묵하고 있는 겁니까? 언론에도 진정한 리더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언론이 되자고 나서는 거에요. 물론, 우리는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지만, 우리가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니까… 다들 ‘당신들이 움직이면 우리가 도와줄게’ 라고 이야기 하니까 저희는 믿었어요. 지성인들을 믿었고, 리더들을, 종교 지도자를 믿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안 나서줬고 결국 저희가 이렇게 나선 거에요. 또 우리가 나서면 따라와 주겠지 했는데, 지금은 다들 눈치만 보고 있죠. LA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위원장이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잘 될 거라고 기대 하시나요?

 

우여곡절 끝에 반쪽자리 특별법이 만들어 졌죠? 그리고 특별 조사위원회를 통해서 특별법 시행령이 제정되고 있습니다. 1월부터 시작이 되어서 빨리 진행이 되어야 하는데, 글쎄요. 왜 이렇게 늦어지는 걸까요. 짐작하시겠지만, 정말 저희는 너무나도 갑갑합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만, 현재로서는 진상규명의 반도 어렵다고 밝요. 그러지 않으려고 이 발버둥을 치는데, 만일 제대로 되지 않으면 저희가 또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니까, 끝까지 가 봐야죠. 

정부가 착각한 게 있어요. 세월호 사건을 정치적으로 실컷 이용하고 질질 끌면서 시간이 지나면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다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잘못 생각한 거죠. 그것이 저희에겐 다지기 기간이었던 거에요. 이제는 우리가 다 알아버렸어요, 다음에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뻔히 알게 된 거죠. 제가 ‘세월호는 다르다’라고 분명히 이야기 하고 다니는데,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그렇게 쉽게 생각했다는 게 정말 이해가 안돼요. 판단 착오에요. 사고 자체도 그렇지만, 그 후의 과정이 많이 힘들었거든요. 두 번 죽인 거죠. 한번 죽은 사람이 두 번 못 죽겠어요. 세 번, 네 번도 죽어요.

 

▲ 진상조사를 위해서는 선체의 인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너무나도 당연 한 것이죠. 그 안에 무엇이 있던 간에 세월호는 반드시 인양을 해야 해요. 진실을 밝히든지 안 밝히든지 반드시 인양을 해야 해요. 왜냐하면 모든 게 거기서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인양을 하지 않고서 어떻게 진실이 밝혀졌다는 결론이 내려질 수가 있나요? 그건 모순이죠.

 

▲ 사람들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으셨겠지만 힘을 받으시는 때가 있으시다면요?

 

이렇게 초청해 주시고 자리를 만들어 주시는 것 자체가 정말 큰 힘이 되죠. 자기 일도 아닌데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해주시는 분들을 보면 정말 너무나 고맙고 힘이 나요. 저는 한번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산 적이 없거든요. “어머니 오셔서 너무 좋아요. 너무 기운 나요”라고 하시는데, 사실 반대로 제가 기운이 나고, 이 분들의 기를 제가 받아요. “내 뒤에 이분들이 있구나, 내가 정말 더 열심히 해야겠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되죠. 사실 어떤 때는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아요. 몸이 지치고 힘들 때도 있고, 세월호의 ‘세’ 자도 들리지 않는 곳에 가서 숨어버리고 싶기도하구요. 하지만 이렇게 저희를 위해서 희생해 주시는 분들을 보면서 다시 힘을 내는 거죠. “나라면 과연 저렇게 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예전 같으면 못했겠지만 지금은 대답할 수 있어요. 이런 일이 다시는 생겨서는 안되지만,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내가 발벗고 나서는 것이 갚는 길이다. 그게 세상이 변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시나요?

 

내일 산호세로 가고요, 그 다음엔 달라스, 휴스턴, 시카고, 뉴욕으로 19일까지 일정이 잡혀 있어요. 

 

▲ 무척 고된 일정이시네요.

 

팽목항까지 20일을 걸을 때 엄마들 15명이 걸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쓰러지지 않는 거에요.(웃음) 그때의 그 힘은 아마도 아이들에게서 나온 거겠죠? 저희는 쓰러지고 싶어도 못 쓰러져요. 저희는 아이를 너무나도 허무하게 보냈어요. 아무것도 못 해보고... 

버스 사고라면 버스를 들어내고, 산사태라면 손으로 땅이라도 파헤치겠어요. 그런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저 바다 한 가운데에서 사고가 난 거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아무것도 못했어요. 그냥 들어가는 걸 보고만 있었던 게 너무나 한이 맺혀요. 그래서 어떻게든 뭐라도 하고 싶어요. 그때 아이를 구하지 못했던 게 너무나 한이 돼서 자책감, 죄의식, 이런 게 너무 많이 들어요.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내가 쓰러지더라도 뭐라도 하고 싶다는 거. 저만의 생각이 아닐 거에요. 우리 엄마들 모두의 마음이 그럴 거에요. 너무나도 허무하게 자식을 잃었으니까... 그런 생각들을 다 갖고 있어요... 그 미안한 마음. 

 

▲ 다른 유가족 분들은 어떤 일들을 하시고, 역할은 어떻게 정해지나요?

 

자발적이에요. 자기에게 맞는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거죠. 저희처럼 간담회를 다니는 엄마도 있고, 대중들 앞에서 말하는 게 힘드신 분들은 다른 일을 찾아서 하세요. 분향소 한쪽에 공방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매일 나비랑 브로치를 만드시고 저녁에 퇴근하시는 엄마도 계시구요. 어떤 아버님 두 분은 계속 광화문을 지키시고, 아침마다 분향소를 청소하는 엄마도 계시구요, 학교에 가서 아이들 책상을 매일 닦아주는 엄마도 계세요. 지금 삼보일배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잖아요. 어떤 아빠들은 매일 광주를 오고 가며 재판에 참여하고 계시구요.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자발적으로 알아서 하는 거에요. 정말 누군가가 저희에게 돈을 주고 하라고 하면 절대 이렇게 못할 거에요. 저희가 아이들을 위해서 하고싶어서 하는 거지 누가 시켜서는 절대 못하죠.

 

▲ 도움을 주는 시민단체나 사회단체는 없나요?

 

물론 많이 있지요. ‘세월호 참사 국민 대책 회의’는 전국의 800여 개 시민단체가 참여해서 구성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 분들도 정말 일을 많이 하세요. 초창기에는 간담회에도 대책위원회에서 함께 가셨어요. 저희가 감정적인 부분들을 이야기 하면 대책위에서는 법률적인 부분이나 기술적인 부분들을 설명해 주셨고 많이 가르쳐 주셨어요. 국민대책회의가 저희를 훈련시켜 주셨다고 볼 수도 있어요. 평범한 저희들은 처음엔 정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이것은 우리의 일이고, 우리 아이들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체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단체가 나서서 유가족들을 도와주신 거고, 1년 동안 가이드를 잘해 주셔서 이제는 저희가 주체적으로 움직이게 된 거겠죠.

 

▲ 끝으로 미주 동포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아무래도 해외에서는 한국보다 더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 주실 수 있잖아요. 해외에서 여러분들이 저희와 같은 목소리를 크게 내주시면 정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또 여기에는 한인들만 계시는 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잖아요. 한인사회를 움직일 수 있다면 전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꼭 부탁 드려요.

 

이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가 봐도 명백한 인권의 문제잖아요. 생명의 존엄성을 가지고 정부가 장난을 쳤는데 그것도 아이들의 목숨인 거에요. 국가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지켜야만 하는 것이 아이들 이잖아요. 그것을 지켜내지 않고 버린 거죠. 왜 국가가 국민을, 그것도 아이들을 버렸을까. 아이들은 국가의 미래잖아요. 이 아이들은 내일 모레면 군대를 가고, 내일 모레면 취직하는 국가의 미래인데 나의 미래를 우리의 미래를 국가가 학살 시킨 거죠. 그래서 모두가 나서야만 하는 거에요. 진실을 밝혀야만 하는 겁니다. 저희는 절대로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저희 힘만으로는 멀리 갈 수가 없습니다. 저희의 동력이 되어주세요. 부탁 드립니다.

 

인터뷰는 입술을 깨무는 흐느낌의 시간도 있었지만, 간간히 작은 웃음도 나눌 만큼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형언 못할 깊은 상처를 한번 더 헤집어 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미안함에 혼자서 힘들어했던 며칠밤이 조금은 억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무뎌짐도 의연함도 아니었다. 차분한 어조와 명료한 말투는 모진 풍파에 깎이고 깎인 자갈 돌처럼 단단한 엄마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끼게 했다.

 

“정부는 우리를 잘못 본거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사그라들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또 어떤 사람들이 그래요. 지겹다고 이제 그만 좀 하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내 자식인데... 자식 일이 잖아요, 자식 일…”

 

 

 

데니스 한 기자

Vol.14-20150313

 

, , , , , ,

0 Comments
Facebook Twitter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