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피리의 전설 정재국 선생
정재국(1942- 현재) 선생은 한국 궁중음악과 정악의 전통을 지켜 온 중요무형문화재 제 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기능 보유자이다. 그는 국립국악원에서 30년간 연주자로 지내며 정악의 흐름을 주도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정악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정악을 연주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그의 이름을 붙인 피리산조를 창시한 현존하는 명인이다.
우리 나라의 산조 역사는 대략 100년 전부터이다. 피리는 전통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악곡의 주 선율을 이끌어가는 주요 악기이지만 막상 홀로 연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독주악기로는 소외되어 왔다. 산조는 가야금 산조를 시작으로 거문고, 대금, 해금, 피리 순으로 생겨났다. 피리산조의 역사는 40여년 정도된다.
피리 연주자로 평생 외길을 걸어온 정통 국악인 정재국 명인은 1942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부모를 잃고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공부에 대한 욕망이 강해 1962년 전액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국악사 양성소(현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정재국은 이 때 당대 최고의 피리 명인 가농 김준현, 김태섭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본격적인 피리 공부를 시작한 정재국은 한번 익힌 가락은 절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정재국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스승의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이후 정재국은 44세의 나이로 타계한 스승 김준현의 뒤를 이어 명인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며 이 시대 최고의 정악피리 대가로 우뚝 선다.
정재국이 학교에 다니던 50-60년대에 피리산조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저 대금 가락을 옮겨 부는 정도였다. 정재국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이충선 선생에게 피리 사나위를 배웠다. 그외에도 전라도에서 피리 잘 불기로 소문난 오진석의 가락을 채보해서 익혔다.
정재국은 오진석의 피리 산조와 이충선의 피리 시나위 가락을 바탕으로 산조를 만들었다. 정재국은 1972년 최초로 피리독주회를 열고 정재국류 피리산조를 발표했다. 총 20여분 길이의 정재국류 산조는 정악의 영향을 받아 꿋꿋한 힘과 웅장함을 지니고 있으며 남도의 토속적인 맛이 진하게 배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72년 최초의 피리 독주회는 사실 최초의 관악 연주회였다. 연주회는 당시 명동에 있던 국립극장에서 열렸는데 정재국은 이 자리에서 산조와 정악, 창작곡 위촉곡 등을 선보였다. 또한 정재국류 피리산조를 비롯 피리 독주 ‘상령산’, 피리 협주곡 ‘자진한입’(이상규 곡)을 연주하면서 피리라는 악기가 독주악기로 주목 받으며 국악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1992년 12월에는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피리 삼중주가 새로운 합주형태로 첫선을 보였다.
정재국은 1966년 국립국악원 전임강사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연주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 후 32년간 한 차례도 국립국악원을 떠나지 않은채 피리 수석연주자, 예술감독 등 국립국악원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
1999년 한국예술 종합학교 전통예술원은 국악기 개량사업의 일환으로 전통피리의 불안정한 음정과 좁은 음역, 역취를 보완하고 현대 창작 음악에서 피리가 제 기능을 충분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개량사업을 추진했다. 정재국은 이 사업을 맡아 추진했는데 2옥타브 반을 넓힌 창작음악용 개량 고음피리(향피리), 저음피리(개량 당피리), 보급용 개량 향피리를 개발함으로써 국악계에 크게 기여했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정진했던 정재국 선생은 전통을 지키며 변화를 추구하며 발전시키는 국악계의 귀한 인물이다.
정재국 선생은 1974년 문화공보부 장관 표창을 비롯해 KBS 국악대상, 대한민국 문화포장 등을 수상한 우리의 문화재이다.
조은정 | 전 UCLA 민족음악과 강사, 가야금 연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