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화 > (1)

윤필립 칼럼

< 승화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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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인류는 이 역경을 맞이해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고통이란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의 지식으로 현재의 현상을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 생기는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거부다. 육체나 정신이 아직 그 현상을 이해하거나 소화하지 못해, 육체는 병들고 정신은 무력감과 절망감에 빠진다. 지혜로운 자에게 역경은 기회다. 그는 그것이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예상한다. 그는 그 고통을 극복하려는 진정한 노력을 통해 자신도 놀랄 만한 인간으로 승화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안다. 어리석은 자는 그런 역경을 상상한 적이 없다. 그는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순조롭게' 흘러갈 거라고 착각한다. 우주와 자연은 인간의 상상대로 돌아가는 법이 없다. 


가을에 열매가 풍성하게 맺혔다고 기뻐하면, 그 기쁨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춥고 배고픈 겨울이 찾아온다. 그 겨울이 온전히 지나가면 서서히 새싹이 돋아나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뜨거운 여름에도 땀 흘리며 노력하게 만든다. 자연은 그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가을의 풍성한 수확으로 보상한다. 사계절의 순환은 고통이라는 신비가 만들어내는 순리이자 섭리다. 고통은 나도 알지 못했던 실력을 발휘할 기회다. 우리 자신을 개조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고통과 아픔이라는 필수불가결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양심은 그것을 소유한 자가 소중하게 여겨 갈고 닦을 때 비로소 빛을 내는 원석이다. 그 원석에서 뿜어 나오는 찬란한 빛은 어둠을 걷어내고, 우리가 헤쳐 나갈 인생이라는 미지의 바닷길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심연에 존재하는 양심을 모르거나 무시한다면, 그는 불행한 자다. 양심은 욕심으로 가득한 자신을 응시해 유기해야 할 군더더기를 절제하고, 흠모할 만한 자신으로 훈련해 나갈 때 서서히 만들어진다. 양심은 그 사람만의 개성을 만들어주는 DNA다. 개인이 자립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갈고 닦아 스스로 훈련하지 않는다면, 그는 늑대를 따르는 양으로 전락해 비참한 운명에 처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깨어 있는 국민 한 사람이 곧 국가다. 양심의 발견이 깨달음이며, 양심의 훈련이 교육이다. 자신만의 양심에 복종하는 행위가 자유이며, 다른 사람의 양심을 경청하는 행위가 배려이자 친절이다.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본 적이 없어 양심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가 무식이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언행이 수치다.


한자 '전정(剪定)'은 모든 상황을 고려해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고자 미리 자신만의 무기를 들고 쓸데없는 가지를 치는 용기다. 전정의 지혜는 내가 정한 구별된 장소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행위를 하나의 원칙으로 그치는 안목이다. '전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prune'도 신기하게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최상의 열매와 꽃을 피우기 위해 미리(pre) 모나지 않은 둥그런(round)모습으로 정리하다'라는 뜻이다. 행복이란 자신에게 허락된 이 무의미한 시간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놀이다. 행복이라는 영어 단어 'happiness'는 '우연히 일어나다'라는 의미를 지닌 영어 동사 'happen'에서 유래했다. 행복한 사람은 이 우연한 순간을 운명으로 여기고 최선을 경주하지만, 불행한 사람은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치부하며 그럭저럭 산다.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불행이다. 두려움은 아픔과 고통을 배가시킨다. 우리는 실제보다 그것에 대한 상상으로 더 큰 고통을 느낀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역경은 우리 사회가, 아니 우리 개개인이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지를 측정하는 시험이다. 선진국은 선진적 인간들의 자연스런 모임이다. 선진적 인간이란 자신의 삶을 위해 혹은 자신의 목숨 바쳐 이룰 수 있는 한 가지를 위해 쓸데없는 것을 전정하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은 전염병이 물러날 때까지 자신의 삶에 여기저기 퍼져 있는 '이기심'이라는 바이러스를 '전정'할 절호의 기회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나는 오늘 무엇을 전정할 것인가?‘


들판의 나뭇잎들은 자신의 색을 울긋불긋하게 변화시켜 하나둘씩 자신의 왔던 땅으로 미련 없이 돌아간다. 그곳에는 그들을 다시 꽃피울 생명의 약동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땅속 깊은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봄이 되면 다시 푸릇푸릇한 잎을 탄생시킬 신비한 힘이 들어있다. 


자신이 바라는 원대한 자신을 발견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그곳은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외부의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하는 내면의 가장 깊숙한 어딘가다. 그곳은 타인이 절대로 가볼 수 없는 장소다. 그곳은 내가 그 장소의 존재를 인정하고 응시할 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장소인 나의 마음이다. 나의 내면 가장 깊숙한 심연에는 나를 가장 나갑게 만드는 아가토스, 즉 최선이라는 샘물이 숨겨져 있다. 샘물은 깊이 내려갈수록 더 맑고 신선한 물을 공급한다. 나는 오늘 그 샘물을 향해 깊이 파내려갈 도구를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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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필립  |  필리핀 중앙교회 담임목사, 아브라함 신학교 총장 

              저서 : ‘그들에게는 예수의 심장이 뛰고 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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