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을 위한 나라 - 2018 대입 수학능력시험을 통해 배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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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을 위한 나라 - 2018 대입 수학능력시험을 통해 배운 것들

관리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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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는 해마다 특정한 날에 온 나라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 하던 일을 잠시 멈추는 곳이 있다. 추모일이나 특정 종교의 엄숙한 의식이 아니다. 물론 최고 권력자의 생일 따위도 아니다. 어찌보면 민족 고유의 현대적 전통일 수 있겠다. 한국의 대학 수학능력 시험날 얘기다.

 

뱅절부절

지난 23일 인터넷에서는 한국의 공항과 근처 상공에 있는 비행기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공항 주변 지도가 화제가 됐다.  www.flightradar24.com 과 같은 사이트들은 비행기의 항로, 비행궤적을 표시해주는데 현재 운항중인 항공기가 어디있는지 실시간으로 위치 추적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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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제주 공항의 모습이다. 비행기들이 착륙을 하지않고 주변상공에서 대기 중이다. 아래의 또 다른 이미지에서는 이 배회하는 비행기들이 서로 고도를 달리하며 주변을 선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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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1시 5분 부터 약 30분 동안 한국의 공항에는 비행기들의 이착륙이 금지되어 이처럼 수많은 비행기가 착륙하지 못하고 상공에서 뱅글뱅글 돌며 대기 중인 모습을 보고 네티즌은 비행기의  ‘뱅절부절’ 한 모습이라며 즐거워했다.

 

실제로 국토교통부는 23일 대입 수학능력시험 3교시 영어 듣기평가 중 항공기 소음을 막기 위해 전국 모든 항공기 운항을 통제했다. 듣기평가가 진행되는 오후 1시 5분부터 1시 40분까지 35분 동안 모든 항공기의 운항이 통제되며 비상항공기와 긴급항공기를 제외한 모든 항공기의 이착륙이 금지됐다. 비행이 금지된 시간 동안에는 이미 비행 중이던 항공기는 관제기관의 통제를 받으며 지상으로부터 3km 이상 상공에서 대기해야 한다. 국토교통부의 이같은 지침은 미국 연방항공국(FAA)을 통해 'NOTAM(NOTice to Airman·조종사 공지사항)'으로 전 세계에 공유된다. 이번 수능 영어듣기평가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국내선 100편과 국제선 54편의 운항 스케줄이 전면 조정된 것으로 전해졌다. 비행기뿐만이 아니다. 시험장 주변에서는 소음이 나지 않도록 차량 통제 및 경적 울림을 자제해야 한다. 

 

1분 1초 차이로 수억 달러가 오가는 금융시장도 수능 시험일에는 돈보다는 수험생이 먼저다. 한국거래소는 시가총액이 1626조원에 달하는 코스피가 거래되는 증권시장과 파생상품시장을 평소보다 1시간 늦은 오전 10시에 개장했다. 또 은행연합회도 23일 아침 "수험생과 감독관, 학부모 등의 이동으로 인해 교통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까지인 은행 영업시간을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로 바꿨다. 교육부는 앞서 수능 시험일 출근 시간을 미뤄달라고 인사혁신처와 산업통상자원부, 지자체 등에 요청했다. 관공서뿐만 아니라 일반 회사들의 출근시간도 수험생들이 수험장 입실 마감시간인 오전 8시10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 시간 가량 늦춰진 곳이 대부분이었다. 

이렇듯 매년 수능 시험일은 온 국민이 학부모가 되고 대한민국의 모든 일은 수험생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역사적인 시험

2018년 대학 수학능력시험은 당초 11월 16일에 치러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시험 하루 전날인 15일, 포항 지역의 규모 5.4 강진의 여파로 시험이 1주일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지진 6시간여 뒤 교육부가 공식 발표를 하기 전까지, ‘신성불가침’처럼 여겨져 온 대학 입시 날짜가 바뀔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진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수능을 주관하는 교육부, 문제를 내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시험을 시행하는 교육청의 대다수 관계자와 청와대도 시험을 연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강진이 발생한 직후, 동남아시아 3개국 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한 문재인 대통령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연기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얘기부터 꺼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참모들 모두 “수능 연기는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다. 문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지진을 겪어 봤냐”고 되물으며 수능을 연기할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참모들은 여진 우려보다는 수능을 차질 없이 치를 수 있는 대책 마련에만 집중했다.

 

오후 5시 45분에 수보회의를 마친 후 오후 6시30분경 수능을 예정대로 치른다는 청와대 브리핑이 있었다. 하지만 두 시간 후 교육부가 수능 연기를 발표했다. 정부 발표는 8시 20분이었지만 실제 문 대통령이 수능 연기를 지시한 것은 7시20분이라고 전해진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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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이번 지진은 책상에 앉아서 대책 마련을 할 것이 아니라 현장에 나가보고 현장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이에 포항 강진 현장으로 내려간 김부겸 행자부 장관이 도저히 다음날 시험을 치를 수 없는 현장분위기를 청와대에 보고 했다. 포항 교육청도 같은 의견이었다. 이에 김수현 청와대 사회수석이 관저에서 저녁 식사 중이던 문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가겠다며 전화를 했고, 문 대통령은 수능 관련 문제라는 얘기에 전화 상으로 바로 결정하자고 말하며 수능 연기를 결정했다고 한다.

 

여진으로 시험장의 안전이 불확실했으며 지진으로 집을 잃어 임시 거처에서 지내야 하는 수험생들의 불편과 불안이 우선적으로 고려된 결정이었다. 적은 인원이라도 공정하지 못한 환경에서 시험을 치르게 할 수 없다는 점도 배려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수보회의에서 “포항에 있는 14개 수능고사장, 230여 개 교실 중 한 곳에서라도 여진으로 창문이 깨지면 수험생들이 다치거나 놀라지 않겠냐”, “여진으로 교실 한 곳에서라도 전기가 끊겨 듣기평가가 안 되면 그 학생들은 누가 책임지나?”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실제로 김부겸 장관이 수능이 치러지는 고사장 학교장들을 만나 면담한 결과, 지진으로 균열이 발생해 안전 문제가 우려된 곳은 14개 고사장 중 11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곳은 사실상 수능을 보기 어려운 상태였다.

 

수능 연기가 발표된 후 이미 버린 책을 다시 어디서 구하느냐는 아우성부터 시험 이후로 예약했던 성형수술 일정이 뒤죽박죽이 되었다는 철없는 보도도 있었지만 사상 최초 '수능 연기' 사태가 벌어진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게시한 '수능연기' 협조문에 달린 누리꾼의 댓글이 눈길을 끌었다. 

 

문 대통령은 자신의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정부는 어제 종합적인 상황 판단 끝에 수능 연기를 결정했다"며 "수능을 준비해 온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울지 충분히 짐작된다”고 썼다. 이어 "그럼에도 정부의 결정을 흔쾌히 수용하고 동의해주셨다"며 "포항과 인근 지역 주민들께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들의 안전과 수능의 공정성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생각한다"며 "이후 입시 일정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철저히 점검하고 대비하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해당 게시물에는 자신을 '고3 수험생 부모'라고 밝힌 이 모씨가 댓글을 달았다.

 

"수능 연기가 조금 불편함도 없지는 않지만 제 아이에게 인생의 추억거리가 되면서도 공동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며 "격무 속에도 신속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신 대통령 이하 정부기관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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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문재인 대통령 페이스북 캡쳐

 

시험에서 배운 것

수능 연기가 모두에게 환영받을 수는 없다. 당장 수능이 끝난 직후 대규모 입시 설명회를 열 예정이었던 입시학원들은 아우성이었고, 16일에 맞춰 컨디션을 최상으로 맞춰 놓았는데 연기된 일주일 동안 흐름이 깨지면 누가 책임질거냐는 볼멘 소리를 하는 수험생과 학부모도 있었다. 가뜩이나 뜨겁고 예민한 교육열을 가진 나라, 전 세계적으로 사교육비를 포함 가장 많은 교육비를 지출하며 일류 대학 입학과 ‘내 아이’의 성공을 위해 경쟁하는 사회에서 “포항 특별전형이라도 바라느냐”며 포항 수험생들에 대한 비아냥은 당연시되었다. 3년 전 수많은 생명을 잃고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아이들에게도 ‘세월호 특별전형’은 안된다며 악다구니를 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주어진 1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수험생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일부 학원가의 ’마무리 특강’ 상술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수능이 끝난 후 문 대통령이 찾은 포항여고의 교실에서 나눈 이야기에 변화가 고스란히 담겼다.

먼저 3학년 담임교사인 윤원경 교사는 “예비소집 중 강한 여진이 발생했다. 아이들이 정말 경황이 없어 바깥으로 나갔고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며 “수능이 큰 시험이라 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고 기존 생각대로라면 치러지지 않을까 했다. 아이들을 보내놓고 수능이 정상 재개된다는 소식에 아이들을 생각해서 가슴이 아파 다른 일을 못 했다”고 설명했다. “8시경에 수능 연기가 전격 결정됐다는 소리를 듣고 그런 결정을 해준 정부 관계자들에게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며 “현장 상황에 대해 귀를 기울여주고 최우선으로 해주신 것에 대해 감동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떨리면서 일부 학생들은 울먹이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수능 연기 결정과 관련, “수능 수험생이 한 59만 명 되는데 포항지역은 5600명 정도로 1%가 채 안 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정부에서도 수능을 연기할 수 있단 생각을 쉽게 하지 못했다”면서도 “만에 하나 지진 때문에 수험장들이 파손되거나 다음날 여진이라도 일어난다면 1%도 안되지만 포항 학생들은 제대로 시험을 못치거나 불안해서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며 “학생들의 안전문제가 있고 잘못하면 불공정한 결과가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라면서 “전체 학생들도 다 중요하지만 포항지역의 1%도 안되는 학생들의 공정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연기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아울러 “정말 고마웠던 것은 나머지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왜 포항 때문에 연기해야 하느냐’고 불평할 만한데도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수능 연기 결정을 지지해줬다”며 “오히려 ‘포항 학생들 힘내라’고 응원도 보내주셨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소수자들을 함께 배려해 나가는 우리 대한민국이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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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연기된 일주일 동안 베스트웨스턴 포항 호텔은 하루 숙박비 22만원의 객실 16개를 공부할 공간이 여의치 않은 수험생들에게 무료로 제공했다. 시험 당일에는 따뜻한 도시락도 준비했다. 지난 10일 수능을 위해 포항에 온 울릉고 3학년 학생 34명은 수능일이 연기되자 고민에 빠졌다. 섬에 들어갔다 겨울철 기상악화로 뱃길이라도 끊기면 시험을 못 볼 수도 있기 때문. 학생들의 이런 딱한 사정을 알게 된 포항 남구 해병대는 주말 복지시설인 청룡회관에 예약된 투숙객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얻은 후 학생들에게 수능일까지 숙식을 제공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16일부터 23일까지 운항하는 항공편을 예약한 수험생과 동반 가족에 대해 예약 부도 위약금을 물리지 않기로 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국가적 고통에 동참하고 고객 편의를 증진하자는 차원에서 수수료 면제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2018년 수능 시험은 결정 번복에 따른 혼란과 손실보다는 사람의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소수의 사람들도 무시하지 않고 함께 기다려줄 줄 아는, 잠시 잊고 살아온 미덕을 한국 사회가 다시 기억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로이스 리 기자

 

Vol.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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