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가 나타났다! - (01)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 최초로 좀비라는 소재가 등장했다.
지난 20일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부산행'은 26일까지 623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북미의 27개 극장에서 개봉한 지난 22일 첫 주말 28만 4,776달러 수입을 올렸다. (미국 박스오피스 전문사이트 BoxOfficeMojo참조) 극장당 평균 수입은 1만 547달러로 박스오피스 2위인 '마이 펫의 이중생활'(7,314달러)보다 높다. '부산행'은 미국 영화 흥행지표로 여겨지는 웹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서 95%에 달하는 신선지수를 기록 중이다. 영화 속 좀비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빠르게 잠식해가듯 영화 ‘부산행’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달리며 관객들을 감염시키고 있다. 1,000만 관객을 기대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상명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연상호 감독은 독립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과 ‘사이비’(2013)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어린이용 또는 가족용으로 치부되던 애니메이션에 사회 비판을 담아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다다를 설립해 ‘발광하는 현대사’와 ‘카이: 거울 호수의 전설’을 제작하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감독과 제작자로 활동해 온 그에게 ‘부산행’은 첫 실사영화다. 애니메이션 감독이 실사영화를 그것도 제작비 100억원대의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게다가 국내에서 블록버스터급 콘텐츠의 소재로는 전무했던 좀비가 주인공이다.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가 현지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마니아를 양산하며 인기를 얻었지만, 좀비는 여전히 '취향을 타는' 소재로 받아들여졌다.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연감독은 왜 하필 좀비인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원래 좀비를 좋아했다.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은 초인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만, 좀비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하지만 규모가 주는 엄청난 위압감과 공포가 존재한다. 그들의 생김새도 슬프고, 측은지심 불러일으킨다. 좀비는 무조건 포악한 괴물과는 다르다. 좀비는 가족일 수도, 지인일 수도 있다. 괴물이면서 동시에 희생자라는 의미가 결합돼 있다. 그래서 우리 영화의 주인공들은 일상적인 인물이어야 했다. 보통 사람이 재난 상황에서 괴물이 되기도 하고 숭고한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유리 벽면을 사이에 두고 좀비와 사람들이 대치하고 있는 이미지가 이 영화의 주제라고 봤다. 물론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어떤 분은 ‘살려고 하는 인간은 연대하지 못하고, 기차를 세우려 하는 좀비들은 연대가 잘 된다’는 말도 하더라. 좀비는 양면성을 갖고 있고, 좀비영화는 사회성을 띨 수밖에 없다.”
칸영화제 공개 당시 외신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좀비 재난물이라는 블록버스터 외피 안에 사회성을 담아낸 시도였다. '부산행'이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괴물'과 함께 언급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설국열차'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괴물'은 미국과 한국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풍자가 담긴 작품이다. 좀비라는 익숙하지 않은 소재는 부성애라든가 재난상황에 대처하는 정부와 언론에 대한 비판 등 공감 가능한 한국적 메시지를 얹어 소재에 대한 관객들의 낯가림을 덜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낯선 좀비가 미국에서는 대중문화의 익숙한 아이콘이다. 서브컬쳐로서의 좀비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기로 하자.
좀비란?
좀비(zombie) 라는 단어는 1819년 처음으로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되었는데 카리브해 연안 지역에서 사용되는 크레올(Creole)어로 ‘움직이는 시체’라는 뜻이다. 서아프리카의 종교인 부두교(Voodoo) 주술사가 시체에 마법을 걸어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한 것을 말한다. 서구 전설 속의 언데드(undead)와 같다.
좀비의 고향(?)은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아이티다.
좀비는 본래 영혼과 육체의 영역에 대해 ‘영혼은 오직 신만이 다룰 수 있다’는 숭고한 믿음의 부두 철학에서 나왔다. 이미 죽은 사람을 어떤 주술로 다시 움직이게 만든다 해도 그 영혼은 이미 신의 손에 닿아 있는 것이니 영혼이 다시 돌아오기는 어렵다고 여겨서 만들어진 개념에 관한 비유였다. 아이티인이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해 나가는 과정에서 부두는 그들의 민중 종교로서 지대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그 승리에 신화적인 색깔을 입히는 많은 무용담을 낳는 가운데 ‘사람을 조종하는 주술’은 매력적인 전설로 자리 잡혀갔다. 주술사가 살아있는 사람을 영혼이 없는 노예처럼 만들 수 있다거나 완전히 죽은 시체를 다시 움직이게 한다는 괴담들은 그렇게 아이티 부두교가 낳은 대중문화로 그 지역을 떠돌았다. 그 종교적인 ‘무용담’은 1915년 아이티를 무력으로 점령해 1930년대 초반까지 군정을 실시했던 미국인들에게도 퍼졌다.
1930년대 저널리스트 윌리엄 시브룩(William Seabrook)은 1929년 자신의 체험담이라며 출간한 ‘마법의 섬’에서 아이티의 부두교를 소개하며 주술사의 시술에 빠져 정신이 통제 당한 채 노예처럼 일하는 좀비에 관해 언급했다. ‘보커’라고 불리는 어두운 주술사는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을 마술로 빼낸다고 하는데, 실제 시브룩이 목격한 바로는 약을 써서 사람을 가사 상태에 진입하게 만든 후 그가 다시 일어나면 보커의 말을 듣는 노예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좀비라는 것이다.
강제노동과 노예제도가 만연한 카리브에서는 죽은 영혼을 마법사가 불러와 로봇처럼 농사일을 계속할 수 있는 시체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었는데, 이는 있을 법한 인신매매 혹은 노예 부림에 흑마술의 신비한 요소가 결합한 것이어서 곧 많은 사람의 흥미를 끌게 되었고, 1932년에 [좀비]라는 이름의 연극으로 탄생해 브로드웨이에 올려졌다. 이 연극을 접하고서 큰 흥행 예감을 느낀 배우 출신의 영화감독 빅터 할페린은 동생인 에드워드 할페린이 제작을 맡고 본인이 각본을 쓴 영화 [화이트 좀비]를 같은 해 만들어 좀비라는 요소를 처음으로 장편영화 속에 등장시켜 호평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 후 몇 십 년은 기억에 흔적도 없는 저질 좀비 영화만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1968년에 좀비 영화의 대가인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1968)'이 상영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
'죽은 자의 책: 좀비 영화사의 모든 것(Book of the Dead: The Complete History of Zombie Cinema)’의 저자 제이미 러셀은 이 영화에 대해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좀비에 대한 신화가 전환점에 도달한 것이었는데, 이젠 좀비가 전 세계적인 파멸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노예 신화에 등장하는 아이티 노예가 사람을 먹는 카니발로 탈바꿈하면서 근대의 좀비 신화가 재정비된다. 단지 걸어 다니는 시체가 아니라 사람을 먹고자 하는 무서운 괴물로 말이다. '좀비의 반란'이 좀비 신화가 세계화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했다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좀비가 카니발화된 것을 뜻했다.”라고 설명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성공으로 이후 좀비 영화는 상업적인 가치를 인정받으며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거듭난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는 ‘좀비’라는 말이 아예 나오지 않지만, 로메로가 정립한 세 가지 원칙, ▲사람의 살을 먹이로 하고 ▲뇌를 파괴해야만 동작을 멈추며 ▲좀비에게 물린 사람은 좀비가 된다는 설정(1954년 나온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은 이후 거의 모든 좀비 영화의 기초가 된다.
이후 ‘좀비의 정의’에 가장 심취했던 사람은 영화 ‘월드워Z’의 원작자인 맥스 브룩스다. 소설 ‘세계대전Z’와 ‘세계대전Z 외전’을 쓴 맥스 브룩스는 저서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를 통해 좀비의 유래와 발생 근거, 신체적 특징과 퇴치법을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게 규정했다.
다음에 계속...
Vol.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