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 혐오 부추기는 백인들의 가스라이팅
“생전 처음 격투기 학원에 등록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엄두가 안 난다”, “핸드백에 호신용품을 들고 다닌다”
미국 내 ‘아시아인 혐오 범죄’가 급증하자 아시아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 정도로 심각한 신변의 위협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인들은 입을 모은다. 미주한인유권자협회 김동석 대표는 “뉴욕같은 대도시에 사는 아시아인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상적인 일에도 두려움과 긴장감을 느끼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인권단체 ‘아시아ㆍ태평양계에 대한 증오를 멈추라(Stop AAPI Hate)’에 따르면 지난해 3월 19일부터 올해 2월까지 미국에서 3975건의 혐오 사례가 보고됐다. 올해 3월에만 무려 2808건이 추가로 접수됐다. 뉴욕의 경우 2019년 3건만 발생했던 아시아인 혐오 범죄는 지난해 28건으로 9배 넘게 늘었다.
SNS에서 떠도는 아시아인들 폭행 장면을 보면 영상 속 가해자는 대개 흑인이나 히스패닉이다. 이 탓에 국내에선 아시아인 혐오 범죄를 주도하는 세력이 흑인과 히스패닉이라는 인종차별적 주장이 난무한다. 과연 그럴까.
미디어가 부풀린 흑인-아시아인 갈등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선 흑인의 집단적 저항 운동이 나타날 때마다 흑인-아시아인 갈등 프레임이 씌워져 왔다. 1992년 LA 폭동 때가 그랬고, 최근 ‘BLM(Black Lives Matterㆍ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 때도 그랬다. 김동석 대표는 “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 정부 들어 아시아인 혐오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백인의 공격이 유색인종에게 집중되고 있다”면서 “하지만 백인이 주도하는 주류 미디어들은 오히려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흑인이 아시안을 공격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유색인종들이 이러한 편향성을 매우 주의깊게 주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통계적으로 봐도 흑인-아시아인 갈등은 부풀려진 측면이 있다. 올해 1월 미국형사사법저널(American Journal of Criminal Justice)에 실린 ‘아시안계 미국인 대상 혐오 범죄(Hate Crimes against Asian Americans)’에 따르면 1994~2014년 발생한 아시아인 대상 혐오범죄 329건 중 74.5%가 백인이 가해자였다.
인종 갈등의 영역에서 흑인과 아시아인이 반목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뿌리깊은 백인 우월주의 전통과 아시아인 혐오 정서에서 유래했다는 얘기가 많다. 소수인종(Ethnic Minority)끼리 갈등이 큰 것처럼 백인 주류 사회가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해왔다는 것이다.
아시아인 혐오의 씨앗, ‘중국인 혐오’
아시아인 혐오의 역사는 1800년대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청나라 말기 중국인들은 아편전쟁(1839년), 태평천국의 난(1850~1864년)을 겪으며 ‘아시아의 환자’로 전락한 청나라를 버리고 태평양을 건넜다.
당시 미국은 서부 개척이 한창이었다. 중국인들은 대부분 철도ㆍ교량 등 토목 사업이나 금광 채굴에 투입됐다. 기업가들은 백인 노동자에 비해 3분의 1의 임금만 받는 중국인을 반겼다. 그러나 일자리를 야금야금 빼앗기던 백인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일자리를 빼앗는 이민족'에 대한 분노는 폭력으로 나타났다. 1871년엔 백인ㆍ히스패닉으로 구성된 폭도 500여명이 LA 차이나타운을 습격해 중국인 19명을 살해했다. 캘리포니아 법원은 폭도 대부분을 증거불충분으로 풀어줬다. 중국인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876년 미국에 천연두가 번지자 백인 사회에선 “중국인이 병을 옮겼다”는 소문이 퍼졌다.
미국 사회는 중국인을 ‘황색 위험(Yellow Peril)’이라고 불렀다. 이 명명(命名)은 미지의 아시안에 대한 미국의 근원적 두려움을 드러낸다. 1882년 미국 사회는 아예 이러한 인종차별적 편견을 제도화했다. ‘중국인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을 제정해 이민 자체를 막았다. 당시 미국이 이민을 막은 이들은 보통 범죄자ㆍ장애인ㆍ성매매자ㆍ질병보유자 등이었다.
중국인 배척은 아시아인 전체에 대한 배척으로 옮겨갔다. 1917년부턴 일본ㆍ필리핀을 제외한 모든 아시아인 이민을 막았고 이 조치는 1943년까지 지속됐다. 1880년 당시 미국인구 5015만여명 중 백인은 85.9%였고 아시아인은 0.2%에 불과했다.
그나마 미국 사회가 호의적이었던 일본인도 차별대우를 받은 건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부터 미국의 군 정보기관은 일본인을 감시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은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적국인 독일계ㆍ이탈리아계ㆍ일본계 미국인을 강제 수용했는데, 그 중 일본계를 가장 엄격하게 다뤘다. 강제 수용된 독일계는 1만여명, 이탈리아계는 3000여명인데 비해 일본계 미국인은 12만2000여명이었다. 뒷날 미국 레이건 대통령은 1988년 이 일에 대해 사과하고 총 16억 달러에 이르는 보상을 약속했다. 지금도 일본계 미국인은 강제 수용을 시작한 2월 19일을 ‘기억의 날’로 지정하고 기리고 있다.
미국을 ‘인종이 샐러드볼’로 바꾼 결정적 순간
아시아인에게 닫혀 있던 앵글로-색슨계 백인의 나라 미국은 1960년대 자국의 인구 구성을 뒤바꾸게 한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당시 미국에선 동유럽계, 남유럽계도 추방해야 한다는 순혈주의 주장이 판쳤다. 1961년 미국 민주당의 코네티컷주 하원의원이었던 로버트 지아이모는 이탈리아 이민 위원회 연설에서 “미국을 발전시킨 주역은 앵글로색슨계 백인이며 따라서 남부 유럽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우려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민자를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온 이가 존 F. 케네디였다. 그는 1958년 책 『이민자의 나라(A Nation of Immigrants)』에서 “미국의 건국이념인 개척정신은 경계를 허물며 앞으로 전진하는 정신이다.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건국이념과 일맥상통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민을 개방해 미국을 ‘민족의 용광로’로 만들어야 한다”고 썼다. 당시 미국 이민시스템은 이미 미국에 자리잡고 있는 국가 출신에만 소수의 쿼터를 배분하는 방식이라 아시아ㆍ남미 등 제 3세계 국민의 이민은 극히 어려웠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그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여론이 급격히 형성됐다. 후임 대통령인 린든 B. 존슨이 1965년 이민법을 개정하면서 미국은 다민족 국가로의 기틀을 마련한다. 이민자에게 국경을 개방할 때에도 미국인들은 아시아ㆍ중남미 이민자가 급증하지는 않을 것이라 내다봤다. 당시 존슨 대통령은 이민법 개정안에 서명하면서 “우리의 사회 구조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새 이민법은 미국의 사회 구조를 '다인종 국가'로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1960년 미국 인구는 1억7932만명, 인종별 분포는 백인 85.4%, 흑인 10.5%, 히스패닉 3.2%, 아시아인 0.5%였다. 이랬던 미국이 2017년엔 인구 3억2100만 명에 백인 61.5%, 흑인 12.7%, 히스패닉 17.6%, 아시아인 5.4%로 완연한 ‘인종의 샐러드볼’로 변신했다.
미국으로 쏟아져들어간 한국인
1965년 이민법이 개정되고 68년 발효하면서 한국인도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당시 한국 정부도 인구 증가 문제를 해결하고자 1962년 해외이주법을 제정하고 해외 이민을 장려했다. 두 제도가 맞물리면서, 한국 현실에 실망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고학력자들이 미국 이민을 택했다. 1980년 한국 이민자 중 대학졸업자 비율은 31.6%로 미국인 16.2%의 2배에 가까웠다. 1970년 9314명이었던 한국인 이민자는 1980년 3만2320명으로 늘었고 이후 매년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태평양을 건넜다.
하지만 아무리 고학력자라도 변방의 아시아인이 미국 주류 사회에 편입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백인 우월주의과 문화ㆍ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기는 힘들었다. 형편이 상대적으로 나은 한국인들은 LA 한인타운으로 대표되는 미국 서부에 자영업자로 자리잡았지만, 닭을 잡거나 과일을 따는 저숙련 노동자의 일을 택하는 이들도 많았다.
문제는 한인이 자리잡은 곳이 흑인 거주 지역이 많았다는 점이다. 문화와 언어의 차이가 흑인과 한국인 사이 오해의 골을 깊게 했다. 흑인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서 돈을 벌어가면서도 정작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으려 하는 한국인에게 불만을 쌓아갔다. 김동석 대표는 “한인들이 장사하는 지역은 흑인 마을인데, 사는 곳은 백인 마을이라 정치인을 후원해도 공화당 백인 의원을 위주로 하니 흑인이 한인을 곱게 볼 수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미국 주류의 인종 갈라치기
흑한 갈등을 더 부추긴 건 백인 주류 사회와 미디어였다. 1980년대부터 미국에선 아시아인을 ‘모범적인 소수민족(Model Minority)’라고 떠받드는 말이 등장해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ㆍ일본이 경제적으로 성장했고, 이민자들도 미국 사회에 무리없이 적응하는 게 다른 소수 민족의 모범이 된다는 의미다. 다분히 차별적 시각을 담은 용어였다. 백인에게 착취당하면서 저항해온 흑인은 분노했다.
1992년 흑인 로드니 킹이 백인 경찰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한 사건에서 가해자들이 무죄 평결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흑인 사회가 분노로 폭발했고 그해 4월 LA 폭동으로 번졌다. 폭동 당시 경찰들은 백인 밀집지역을 철통같이 지켰다. 대신 길목에 있던 한인 상점들이 습격을 받아 2000개가 넘는 가게가 피해를 봤다. 재산 피해는 3억~5억 달러에 이르렀지만, 주정부나 연방정부 차원의 보상은 없었다. 김동석 대표는 “이후 한인들은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커뮤니티에 참여하고, 흑인과의 교류를 확대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재 한인들은 아시아인 중 미국 정치에 가장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미국 하원의원 중 아시안계는 16명인데, 그중 4명이 한국계로 인도계와 더불어 가장 많다. 특히 공화당 하원의원은 2명이 아시안계인데 모두 한국계다.
또한 흑인과 감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가장 깊게 연대하는 것은 한인이다. 2020년 아시안계 미국인 유권자 조사에서 흑인 차별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은 한국계가 92%로 가장 높았다. 애틀랜타 연쇄 총격 사건으로 한국계 여성 4명이 숨졌던 지난 3월엔 LA한인타운에서 40여개 한인 단체 주관으로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범죄 근절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는데, 흑인ㆍ히스패닉 단체가 대거 참여해 뜻을 같이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