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가 되신 할머니 강인한 생존자, 용감한 증언자 김군자 할머니 별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요안나) 할머니가 7월 23일 오전 8시 (한국 시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1926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0살에 부친을 14살에 모친을 잃으면서 고아가 됐다. 이후 친척집에서 자랐고 16살에는 사랑하는 남자도 만나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김 할머니는 1942년 17살 나이에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琿春) 위안소로 강제 동원됐다. 훈춘에 도착해서도 김 할머니는 돈 벌어오라고 보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그곳에서 일본 군인들의 성 노리개가 돼야 했다.
해방 후 38일을 걸어 조국에 돌아왔다는 할머니는 "하루에 40여 명을 상대로 성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아서 고막이 터졌다"고 위안소 생활을 기억했다. 도망도 쳐봤지만 그때마다 들켰고 구타가 돌아왔다. '이렇게 살면 뭐하나…' 위안부 생활 3년 동안 7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번번히 죽지 않을 만큼까지 맞았다. 죽지 못해 사는 게 한스러웠다.
이후 고까시로 옮겨졌고 전쟁이 끝나자 한달 넘게 걸려 함경북도 성진에 도착했다. 두만강을 넘을 때는 함께 탈출했던 친구 1명이 강물에 떠내려가 죽는 것을 지켜 봐야 했다. 그렇게 죽을 고비 끝에 고향에 돌아왔다.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와 동거하며 잠시 행복했지만 남자 부모의 반대가 극심했고 결국 남자는 자살을 택했다. 동거 생활 3개월이 김 할머니에게 안긴 것은 임신. 오갈 데 없는 김 할머니는 월남했고 겨우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이 아이도 5개월만에 숨졌다.
혼자가 된 후 숨어 살던 김 할머니는 1998년부터 경기 광주 나눔의 집에서 생활해왔다.
할머니는 2007년 2월 마이크 혼다 미국 연방하원이 주최한 미국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끔찍했던 과거를 증언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떠올리기 싫은 과거를 털어놓고 나면 가슴이 뛰고 악몽으로 잠을 설치게 되지만, 살아있는 한 그리 할 것이라며 "짓밟힌 내 삶이 불쌍하고 억울해서라도 '내가 살아있는 한' 사과를 받아내야 합니다.”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그러나 할머니는 결국 소망이 이뤄지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떠났다.
김 할머니는 지금까지 받은 지원금을 사용하지 않고 모아 이웃들을 위해 기부해 온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아름다운 재단 제1호 기금 출연자로서 재단에 1억 원을, 수원교구 성심장학회에 1억 원을 전달한 바 있다. 또 수원교구 퇴촌본당을 통해서도 장학금을 지원했다.
할머니의 뜻에 따라 장례는 7월 25일 오전 10시30분 퇴촌성당에서 장례미사가 봉헌됐다.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는 이날 장례미사를 직접 주례했으며, 김 할머니의 시신은 미사 후 화장, 나눔의 집에 봉안됐다.
김 할머니의 별세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생존자는 37명이 됐다.
Vol.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