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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의 생애와 업적"

관리자 0 133 2018.12.1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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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성장>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태어난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열여섯 살 때 평양에서 청일전쟁을 접하고 일본과 청나라가 마음대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싸우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는 까닭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 깨달음을 통해 그는 그때까지의 평범한 생활을 깊이 반성하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도산은 19세에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 지부를 결성하였으며,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첫 연설을 함으로써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리버사이드와 공립협회 활동> 

 

1902년 유학을 위해 도미한 안창호는 동포들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공부를 포기하고 계몽에 나섰다. 

 

도산이 리버사이드에 첫 발을 디딘 때는1904년 초로 그의 나이 25 세 때이다. 장경 등의 권유로 리버사이드로 온 도산은 당시 몇 안되는 동포들의 생활 개선에 힘썼다. 미국인 농장주의 도움으로 노동주선소를 설립한 도산은 한인뿐 아니라 각국에서 몰려든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했다. 

 

“오렌지 하나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다” 라는 도산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파차파 한인타운을 형성한 이들은 스스로 규칙을 세워 모범을 보였다. 또한 한글학교와 교회를 세워 후세 교육에도 정성을 다 했다. 이곳을 방문한 강영소가 도산공화국이니, 이상촌이니 하고 극찬했던 칭송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정직과 성실로 경제적 자립을 이룩한 이들은 훗날 흥사단, 대한인국민회의 일원으로 조국 광복의 주춧돌이 되었다.

한인의 수가 점차 늘자 도산은 공립협회를 결성하게 된다. 처음 8명으로 시작해 조만간에 35명으로 발전한 공립협회는 미주 본토 최초로 목적과 규약을 지닌 한인 최초의 정치 단체로 훗날 대한인국민회의 토대가 되었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에 창립되어 도산이 귀국하기까지 2년 미만의 단기간에 600명의 회원을 모았다. 또 3층 건물의 회관을 마련하고, 매월 두 차례 공립신보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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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 활동> 

 

도산이 미국에 있던 5년동안 국내 정세는 날로 위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도산은 동지들과의 상의 끝에 본격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귀국을 결심하고, 1907년 초 귀국 길에 올랐다. 이 때 그의 가슴 속에는 국내에서 전개할 구국 운동의 새로운 목표와 방법론과 조직형태가 그려져 있었다. 즉, 민주공화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운동의 목표와 독립전쟁 준비론이라는 국권회복의 방법론과 비밀결사인 신민회 조직이 그것이었다.

 

귀국 즉시 도산은 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갑 등 국내 계몽운동의 핵심 인물을 찾았다. 그는 새로운 구상을 설명하면서 비밀결사체를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구국운동을 총지휘했던 신민회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도산은 신민회를 중심으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교육·언론·산업 등 여러 부문에 걸쳐 다양한 사업들을 벌이게 하였다. 도산이 주도했던 신민회운동은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약 3년간 일제하의 독립운동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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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활동> 

 

1910년 5월, 미주에서 활동하던 단체들이 통합해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었다. 이는 공립협회를 비롯한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각 한인단체가 합쳐진 조직이었다. 처음에는 북미 지방총회와 하와이 지방총회만 있었으나, 계속하여 시베리아 지방총회와 만주 지방총회가 설립되었다. 1912년 11월에는 도산의 주관으로 4개 지방총회 대표자가 모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하고, 도산을 중앙총회장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해외 한인 조직은 도산을 중심으로 하나로 결집했다. 이후 도산은 대한인국민회 활동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와 같은 대중적이고 정치적인 운동으로는 민족운동의 핵심인 인재를 양성할 수 없음을 절감한 도산은 새로운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흥사단을 창단하게 되었다.

흥사단은 청년학우회의 취지를 계승한 것으로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족운동의 핵심 인물을 기르기 위해 조직되었다.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흥사단은8도 대표를 포함하여 25명의 창립위원으로 탄생했다. 흥사단은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두고 활동했으며, 3ㆍ1운동 후에는 중국과 국내에도 단우를 확보하고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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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 활동> 

 

흥사단 운동을 평생의 업으로 여기고 있던 도산은 3ㆍ1운동 소식을 접하자 국민회의 대표 자격으로 중국으로 갔다. 5월말 도산이 상해에 도착하자 상해에는 이미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도산은 내무총장에 선임되어 있었다. 도산은 정부 형식이 아닌 정당 형식의 독립당 결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은 기정 사실로 되어 있었고, 청년들은 그의 취임을 강력히 재촉하였다. 도산은 첫 각료로 취임해 국무총리 대리를 겸하면서, 명의상 정부에 불과한 임시정부의 실체를 갖추는 데 전력을 쏟았다. 국민회에서 가져온 자금으로 정부청사를 얻고 각료로 추대된 각지의 인물들을 불러 모았으며 독립신문 발간과 독립운동 방략 작성을 주도했다.

 

그러나 상해 임정 외에도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 정부가 조직되어 있었고, 서울에도 한성정부가 구성되어 있는 실정이어서 그 통합이 시급했다. 도산은 3개월에 걸친 헌신적인 노력 끝에 결국 통합을 이루어냈다. 이후 통합 임정의 국무총리인 이동휘를 비롯하여 각부 총장들이 차례로 취임하고 대통령 이승만까지 합류함으로써, 임정은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면모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임정의 중심인물이 되어야 할 이승만과 이동휘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다. 도산의 적극적인 중재에도 불구하고, 이동휘가 임정을 떠났으며, 이승만도 미국으로 가버렸다. 도산은 임정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가 전체가 한번 크게 모여 다시 의견을 결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임정을 사퇴하고 국민대표회 개최를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1923년 초부터 국민대표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 새정부창조론ㆍ임정개조론ㆍ현상고수론 등으로 갈려 끝내 유회되고 말았다. 


<대독립당과 한국독립당 활동>

 

1926년 5월 말 다시 상해로 간 도산은 좌우 합작의 대독립당운동에 앞장섰다. 도산은 산발적으로 논의되는 데 그치고 있던 좌우합작문제를 본격적인 실천운동으로 끌어올렸다. 도산의 주도로 시작된 좌우합작 운동은 한동안 활발히 추진되었으나, 1920년대 말 한국독립당과 한국 독립운동자동맹으로 나뉘어지고 말았다. 

 

한국독립당은 상해에서 조직된 우리 나라 최초의 민족주의 정당이었는데, 도산과 이동령 등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28명이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도산은 기초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대공주의(大公主義)에 입각한 한국독립당의 강령을 주도했다. 후일 도산이 국내로 압송된 후 한국독립당에 모였던 인물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지만, 임정을 비롯한 모든 단체들은 도산의 뜻이 반영된 강령만은 대부분 그대로 계승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도산은 오래 기다리던 기회가 오고 있다고 판단하여 본격적인 반일혁명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산은 윤봉길 의거의 여파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피체되었다. 도산은 동우회사건 등 4년 반에 걸친 두 차례의 감옥생활 끝에 얻은 병이 악화되어 1938년 3월 10일 경성대학(서울대) 부속병원에서 만 59년 4개월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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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1월 9일은 제1회 가주 '도산 안창호의 날'>

 

지난 8월 28일, 캘리포니아 주 상원 의회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탄생일인 11월 9일을‘도산 안창호의 날’로 제정하기로 결의하고 선포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의 기념일을 제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주 상원의 결의안 통과에 앞서 주 하원은 “1878년 태어난 안창호 선생은 한국의 가장 중요한 애국지사 가운데 한 명으로 한국인들에게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존재”라고 높이 평가했다.  

 

다음은 LA 흥사단에서 제공한 가주 '도산 안창호의 날' 제정 경고 보고서 전문이다.

 

- 최창호 전 LA흥사단 대표

 

가주 ‘도산 안창호의 날’ 제정 경과보고 

 

[ 2017년 ]

10월 26일, LA흥사단은‘도산 안창호의 날’제정을 위해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등 관련단체와 함께 가주 68지구 최석호 하원의원을 초청,‘도산 안창호의 날’제정의 필요성과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도산 안창호의 날’제정 결의안을 가주 의회에 상정해 줄 것을 요청하다.

[ 2018년 ]

- 4월 7일, 최석호 의원을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으로 다시 초청해 결의안 (Resolution)에 담을 내용과,‘도산 안창호의 날’로 도산 탄생일(11월 9일)과 도산의 샌프란시스코 도착일(10월 14일)을 두고 토론하다. 

- 4월 13일, 두차례에 걸친 토론회 및 각계 의견을 토대로 선생의 탄생일인 11월 9일을‘도산 안창호의 날’로 하기로 하고 최종 결의문을 최석호 의원에게 전달하다.

- 8월 13일, 가주 하원의회에서 주 발의자인 최석호 의원의 모두 발언과 Jim Patterson, Jose Medina의원의 공동 발의로‘도산 안창호의 날’제정 결의안 (ACR 269)을 상정하고, 참석의원 71명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다. 이날 LA/San Francisco 총영사관, 관련단체등 50여 명의 미주 한인들이 참석하여 결의안 통과를 축하하다. 

- 8월 28일, 가주 상원의회는‘도산 안창호의 날’제정 결의안을 찬성 39, 반대 0, 기권 1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시키고, 올해부터 도산 안창호 선생의 탄생일인 11월 9일이‘도산 안창호의 날’로 제정되었음을 선포하다.

- 10월 2일, 미주도산기념사업회,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흥사단은 2018년 11월 9일, 제1회‘도산 안창호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공동 주최하기로 하고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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