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봉오동 전투”를 보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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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봉오동 전투”를 보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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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8월 7일, 한국에서는 영화 '봉오동 전투'가 개봉한다. 

 

'살인자의 기억법', '용의자'를 연출했던 원신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배우 유해진, 류준열, 조우진이 주연을 맡았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현재의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 골짜기에서 독립군 연합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다.

 

일제 강점기의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을 다룬 영화인만큼 일부에서는 애국심에만 호소하는 '국뽕 영화'가 나온 것 아니냐는 논란도 있지만,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 이른바, 화이트 리스트 배제 조치 예고에서 비롯된 반일 정서가 고조되는 시점에서 개봉하는 데다가 기존의 항일 영화와 달리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개봉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미국에서의 개봉 여부는 아직까지 알 수 없지만, 영화 '봉오동 전투'를 감상할 계획이 있는 독자들을 위해 '봉오동 전투'의 역사적 배경과 그 후에 이어진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역사에 대해 연대별로 정리해 본다. 

 

지면관계상 매우 간략하게만 설명하므로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사건별로 더 자세히 알아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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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4월 - 신민회 설립 - 안창호, 양기탁, 이승훈 등이 중심이 된 구한 말기 최대의 항일 비밀 결사 단체,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 운동에 중심을 두었으나 국외에서는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씀. 추후 만주 삼원보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함.

 

1909년 10월 26일 -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 1907년부터 의병운동에 참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 1910년 3월 26일 30세의 나이로 뤼순 감옥에서 순국(사형집행).

 

1911년 6월 10일 - 신흥 강습소 설립 - 이상룡을 주축으로 윤기섭, 이시영, 이회영 형제와 김형선, 이장녕, 이장직, 이동녕 등 군인 출신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독립군 양성 학교.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신흥강습소란 이름을 내걸었으나 초기부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 학교의 성격을 지님. 신흥이란 이름은 신민회의 ‘신’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자를 합쳐 만든 것으로 1919년 3.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개명.

 

1913년 5월 13일 - 흥사단 창립 -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단체. 신민회 산하 ‘청년학우회’가 흥사단의 전신으로 1903년 도산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 설립한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와 구국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뿌리를 두고 있음.

 

1919년 3월 1일 - 3.1 만세 운동 -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비폭력 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의 주도로 고종의 장례일에 맞추어 서울시 종로구 소재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함. 

 

한반도 전역에서 5월까지 계속된 만세 운동으로 수많은 폭력 진압과 학살 사건이 발생.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집회인수 106만여 명, 사망자 7509명, 구속수감자가 4만 7천여 명. 3.1운동으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독립을 향한 마음이 서로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만주지방에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삼일운동으로 인해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됨. 전 세계에 독립의 의지를 전파한 결과, 1945년 일본 패망 후 승전국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인정받음. 

 

1919년 5월 3일 - 신흥무관학교 개교 - 신흥강습소가 신흥무관학교로 개명함. 현 경희대학교의 전신.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서로군정서 의용대,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 광복군 등에 참여해 무장 독립운동의 한 축을 차지하며 민족 해방에 크게 기여함.

 

1919년 4월 11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3.1 독립선언서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 정부. 

 

중국 상하이에 설립되었으며 같은 해 9월 11일 경성(서울)과 러시아 연해주 등 각지의 임시 정부들을 통합하여 상하이에서 단일 정부를 수립.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리 제도를 확립함.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 한국 광복군 조직 등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지원하였고, 중국 국민당, 소련, 프랑스, 영국, 미국 등으로부터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받음.

 

1920년 3월 15일 - 온성전투 - 홍범도, 서일, 최진동, 양하청 등이 이끄는 독립군(국민회군, 북로 군정서군 등)이 두만강 대안의 온성군 일대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 

3월 15일부터 27일까지 10여일 동안 소규모로 편성된 독립군이 여러 차례 두만강을 건너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 막강한 무력을 갖춘 일본군을 상대로 수비전이 아닌 공격전을 펼쳤다는데 큰 의의가 있으며, 만주 독립군에 대한 일제의 신경을 자극시켜, 같은 해 6월 독립군전투사상 최대 승첩인 봉오동전투를 유발시킨 계기가 됨.

 

1920년 4월 - 사월 참변 - 1917년 러시아에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 시베리아가 혼란에 빠지자, 1918년 4월 일본은 시베리아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시베리아출병을 단행. 그러나 1920년 3월 니콜리스크에 적군이 공격하여 다수의 일본거류민을 학살하자,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한인에 대하여 대대적인 학살 작전을 전개함.

1920년 4월 신한촌(新韓村)을 기습하여 한민학교(韓民學校)와 한민보관(韓民報館)등 주요건물을 불태우고 무고한 한인을 학살함. 

4월에서 5월까지 무수한 교민이 학살되었고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 다수의 한인지도자가 사살되거나 체포됨.

 

1920년 6월 4일 - 삼둔자 전투 - 6월 4일 새벽 5시부터 6월 6일 자정까지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 만주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월신강변 삼둔자(三屯子)에서 니히미 지로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 예하 1개 중대를 격파한 소규모 전투. 

독립군이 국내 진공을 목적으로 일본군을 선제 공격한 사건이자, 일본이 최초로 중국 대륙을 침공한 사건. 봉오동 전투로 이어지게 됨.

 

1920년 6월 7일 - 봉오동 전투 - 1920년 6월 6일~6월 7일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 최진동,안무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 중국 지린 성 허룽현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싸운 전투로,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독립군은 천 2백여 명, 일본군은 5백여 명. 

 

(삼둔자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 제19사단은 출병하여 간도 내의 독립군 토벌에 나선다. 1920년 6월 7일 북로 제1군 사령부(간도국민대) 부장 홍범도는 군무 도독부군,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고 봉오동 골짜기 인근에 포위진을 짜고 제3소대 분대장 이화일을 시켜 일본군을 유인해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소나기가 내리쳤고, 일본군 부대는 선봉으로 올라가던 일본군 부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가하면서 교전했다. 고지 꼭대기까지 올라간 홍범도 부대는 이를 내려다보고 남은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했다.

6월 7일 오후 1시쯤, 일본군이 봉오동 상동(上洞) 남쪽 300m 지점 갈림길까지 들어오자 홍범도는 신호탄을 올렸다. 삼면 고지에 매복한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된 봉오동 전투는 3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사상자가 늘자 월강추격대대는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강상모가 2중대를 이끌고 쫓아가 다시 큰 타격을 입혔다. 임시정부 군무부는 봉오동 승첩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한 반면 아군은 불과 4명만 전사했다고 발표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 측 피해는 전사자 157, 중상 200, 경상 100명이며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자 4, 중상 2명에 불과했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북로독군부군은 청산리로 옮겨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연합하여 청산리 전투를 전개해 나가게 된다.)

 

1920년 8월 - 훈춘사건 - 일제가 봉오동 전투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중국 마적단을 매수해서 훈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게 한 뒤에 이를 계기로 만주의 한국인을 학살한 사건. (최근에는 일본의 자작극이 아니라 실제 독립군의 투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1920년 10월 - 청산리 대첩 - 김좌진, 나중소, 서일, 이범석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 등을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 10여 차례 간도에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벌인 전투의 총칭.

독립군의 규모는 3050~4700명, 일본군 병력은 3만~3만5천 명. 독립군 연합부대의 전사자는 130명, 부상자 90명, 실종자 2백여 명, 일본군의 피해규모는 전사자 1200명, 부상자 3천여 명으로 추산. 

 

(삼둔자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연패한 일본군은 중국의 영토를 불법으로 침략했다는 비난을 만회하고자 훈춘 사건을 날조하고, 이를 계기로 만주에 대규모 부대를 투입하게 된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길림성화룡현 내의 여러 지역에서 교전하여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본군을 크게 대파하게 된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일제가 1920년 초부터 계획한 만주 내 한인 독립군 전체에 대한 초토화 계획을 실패로 만들었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에서의 대승을 계기로 일본은 중국에 압력을 행사하여 한인 독립군들이 러시아로 일부 건너가는 등 만주 독립군들은 해체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1920년 10월 ~ 1921년 1월 - 간도참변(경신참변, 간도대학살) -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독립군 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920년 일본군이 만주로 출병하여 무고한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 

훈춘사건을 일으켜 만주로 대거 출병을 시킨 일본은 특히 독립군이 청산리와 봉오동전투에서 추격하던 일본군을 대파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무차별적인 한인 학살 작전을 전개함. 

3~4개월에 걸쳐 수많은 한인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했으며, 한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 옌지현[延吉縣] 이란거우[依蘭溝]에서는 30여 호의 전 주민을 몰살하고 마을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현재 확인된 학살피해자만 3,469명. 

그 외 확인되지 않은 숫자와 3~4개월에 걸쳐 학살된 수를 합하면 적어도 수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됨.

 

1920년 12월 - 대한독립군단 조직 -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 등의 패배로 일본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자,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 세력들이 노령(露領) 연해주(沿海州)로 건너가 장기 항일전을 준비하기로 하고, 1920년 12월 중·소 국경 부근인 밀산(密山)에서 독립군 세력을 하나로 통합한 연합부대 대한독립군단을 창설함. 

연합에 참여한 부대는 북로군정서 (서일, 김좌진), 대한독립군 (홍범도), 서로군정서 (지청천), 대한국민회 (구춘선, 이명순), 의군부 (이범윤) + 군비단 (의군부 잔여부대, 김홍일), 광복단 (이범윤), 혈성단 (김국초), 군무도독부 (최진동), 야단 (아소래), 대한정의군정사 (이규), 의민단 (방우룡)

 

1921년 6월 28일 - 자유시 참변(흑하사변) - 러시아 스보보드니(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에서 러시아 적색군(赤色軍, 적군)이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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