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이재명 - 역사학자 전우용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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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이재명 - 역사학자 전우용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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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이재명


민속, 민담, 민화, 민요, 민예, 민간신앙, 민간요법 등 ‘민(民)’자가 앞에 들어가는 단어들은 대체로 세련되지 못함, 서투름, 정교하지 않음, 투박함, 촌스러움 등의 이미지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한자 ‘민(民)’의 의미가 본래 이렇습니다. ‘민’은 ‘상처난 눈[=목(目)]’을 형상화한 글자입니다. 옛날 중국 도시에 살던 지배자들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성 밖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의 한쪽 눈을 멀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같은 사람이라도 ‘인(人)’과 ‘민(民)’을 차별하는 언어문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유교 경전인 『논어』에는 “큰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일을 삼가고 믿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비용을 절감하고 인(人)을 아껴야 하며, 민(民)을 부림에 때를 맞춰야 한다(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은 군주가 ‘아끼는 사람’이고 ‘민’은 ‘부리는 사람’입니다. ‘인’은 도시에 살면서 왕을 보필하는 사람이고, ‘민’은 농촌의 땅에 속박된 사람이었습니다. ‘인’은 지배자이자 교육 받은 자였고, ‘민’은 피지배자이자 못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인민’이라는 말은 대립하는 두 부류를 한데 묶은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도시에서 직업활동하는 사람들은 정치인, 경제인, 문화예술인, 언론인, 군인, 상인 등으로 불리지만, 농어촌에서 직업활동하는 사람들은 농어민으로 불립니다.


청나라 때의 중국인들이 데모크라시(Democracy)를 ‘민주주의’로 번역한 것은, 이 제도 또는 이념을 높이 평가해서 그랬던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들은 못 배운 사람들, 천명(天命)을 모르는 사람들이 나라의 주인 노릇하는 체제를 경멸했습니다. 게다가 ‘민주주의’는 번역의 관행적 원칙에서도 벗어난 단어였습니다. 한자어에서 ‘주의(主義)’로 번역된 것은 내셔널리즘, 캐피탈리즘, 리버럴리즘, 휴머니즘 등 ‘이즘 ~ism'으로 끝나는 단어들이었습니다. 그리스어 데모스(Demos)는 도시 밖에 사는 농민, 민중이라는 뜻으로 그 의미가 한자 ’민(民)‘과 같지만, 크라토스(Kratos)는 ‘지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중국인들은 ‘민주정체’나 ‘민중지배’로 번역하지 않고 ‘민주주의’로 번역함으로써 데모크라시를 가치와 이념의 문제로 치환했습니다. 서양인들을 오랑캐로 멸시하던 태도가 이런 번역어를 낳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런 ‘의도적 번역’은 한자문화권에서 민주주의의 의미를 확장시켰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정치체제를 넘어선 가치, 문화, 태도 등의 문제로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 일부가 ‘민주주의’라는 말을 처음 접한 것은 140여 년 전인 1884년의 일입니다. 당대의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하늘이 군주를 내고 군주는 천명(天命)을 받들어 세상을 다스린다’는 오래된 정치관을 진리로 생각했습니다. ‘민(民)’을 천시하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좋은 정치체제나 이념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전제군주제 하에서 민주주의를 입에 올리는 것은 대역죄(大逆罪)에 해당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은 망국(亡國)이 목전(目前)에 닥친 1907년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민’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1897년 8월 23일, 윤치호는 ‘대군주 폐하 탄신 경축회’에서 “완고 세계에는 백성 민(民)자가 종 민자가 되어 백성은 다만 관인의 의식(衣食) 공급하는 종이 되었은즉 다시 백성이 위가 되고 관인이 아래가 되어야 개화가 될 것이오.”라고 연설했습니다. 이때부터 ‘민’을 귀하게 여기자는 계몽이 본격화했고, 이듬해 4월에 열린 만민공동회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장 이름부터 ‘만인’이 아니라 ‘만민’이었고, 개막 연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맨 끝에 해당하는 싸전 상인이 맡았습니다. 그 반년 뒤, 고위 관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시 만민공동회가 열렸습니다. 이 행사에서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의정부 참정 박정양의 인사말 뒤에 바로 단상에 오른 사람은 평민들에게조차 천대 받던 백정(白丁) 출신 박성춘이었습니다. “저는 대한에서 가장 천하고 무지몰각한 사람입니다.”로 시작한 그의 연설은, 의정부 참정대신이나 백정이나 다 같은 ‘대한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면서 20세기에 들어서부터 민족, 국민 등의 개념어가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을사늑약을 겪은 뒤 민족운동가들은 전제군주제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승인을 강요하자, 고종은 “이렇게 중요한 일은 널리 백성의 의견을 구한 뒤에야 결정할 수 있소.”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이토는 “귀국은 전제군주국이요. 페하 혼자 결정하면 그뿐, 백성의 의견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라며 윽박질렀습니다. ‘민’이 권리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다는 생각이 사람들 마음속에 폭넓게 자리 잡았습니다. 나라가 망한 뒤, 다시 전제군주국으로 독립하기를 바란 사람은 아주 적었습니다. 이것이 1919년 3월 1일의 독립선언이 ‘2천만 민중의 성충을 합하여’ 이루어진 이유이자, 3·1운동으로 건국한 나라의 이름이 ‘대한민국’이 된 이유입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군주의 나라가 아닌 ‘민’의 나라가 생겼습니다. 게다가 대한민국임시헌장 제3조는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이라고 선언했습니다. 1919년 시점에서, ‘인민’의 전면적 평등을 선언한 것은 대단히 선구적인 일이었습니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지향이 보편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일본 군국주의는 만세일계의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식 정치체제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가르쳤고, 그 주장에 물든 한국인도 많았습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을 재건한다고 선언했음에도 민주주의가 바로 정착하지 못한 이유는 민주주의 원칙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 민주주의가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아주 많았기 때문입니다. 천황제 군국주의가 가장 좋은 정치제도라고 가르친 일제 교육의 잔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일본 천황제 군국주의를 떠받쳤던 정치적, 사회적 기구들과 구호들을 부활시켰지만, 지금도 그 시절을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악덕은 언제나 현재의 짐이 되는 법입니다.


민주주의의 기초는 만민평등 사상, 모든 사람이 법 앞에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는 생각입니다. 데모크라시를 민주주의로 번역하던 시절의 ‘민’은 천대 받는 사람들이었으나, 오늘날의 ‘민’은 스스로 주권자의 자격을 획득한 사람들입니다. ‘인’과 ‘민’을 차별하지 않는 것, 엘리트와 민중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요체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자리 잡는 과정은 곧 특권과 싸우는 과정이었습니다. 권리 없는 민(民)이 특권을 지닌 엘리트 집단에 맞서 싸우자면 어느 나라에서나 희생이 불가피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도, 동학농민혁명, 삼일운동, 4.19, 5.18, 6.10, 촛불시위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들의 누적된 성과입니다.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그토록 많은 희생자를 내었지만, 군주제와 군국주의의 망령은 여전히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형식적 민주주의나마 실현하고 산 세월은, 반만 년 역사 중 고작 반 세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길을 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잠시라도 페달에서 발을 떼면, 제 자리에 서는 게 아니라 뒤로 후퇴합니다. 히틀러의 나치즘을 낳은 것이 당대 세계 최상의 민주주의를 실현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특권적 관료와 귀족들에 맞서 ‘민’의 지위를 높이려는 운동과 결합해 있었습니다. 가장 천한 사람, 가장 어려운 사람, 가장 가난한 사람의 말을 먼저 듣는 것,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민주주의의 가치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정식품 이하라도 사 먹는 사회’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라도 사람답게 먹을 수 있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검사 사위를 두면 죄를 지어도 괜찮은 나라’가 아니라, ‘검사 사위가 없어도 억울한 일 당하지 않는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 이상의 실현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특권 귀족의 전횡이 일반적이던 시대로 되돌아갈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재벌권력, 사법권력, 언론권력이 다시금 특권집단이 되어 ‘민’을 ‘할 말이 있어도 못 하는 사람’, ‘죄가 없어도 벌 받는 사람’, ‘최저임금 제한도 없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의 지위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후보는 ‘민’을 천시(賤視)하는 말을 거리낌없이 하고 있지만, 유수의 한국 언론은 노골적으로 그의 편을 듭니다.


가난하고 힘 없는 ‘민’이 천대 받지 않는 시대라야 ‘민주주의 시대’입니다. 극빈 가정에서 태어나 우리 사회에 남아 있던 귀족제 시대의 잔재들을 온몸으로 겪었던 이재명은 이제껏 가난한 사람, 힘 없는 사람, 어려운 사람들을 대변하면서 특권세력에 맞서 왔습니다. 이재명의 삶 자체가 천대 받던 ‘민’이 주권자로 일어서는 과정이었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향한 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정치체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민(民)’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향한 가치와 지향입니다. 그 가치와 지향을 시민들과 공유하며 함께 걸어갈 사람은 이재명뿐입니다.


- 역사학자 전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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