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정두언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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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정두언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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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62) 전 새누리당 의원이 16일 오후(한국시간) 서울 홍은동 자택 인근 실락공원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정두언 전 의원은 이날 자택에 유서를 써놓고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유서를 발견한 정두언 전 의원의 부인이 경찰에 신고를 했고, 경찰은 드론과 구조견 등을 투입해 수색에 나섰지만, 오후 4시 25분 끝내 숨진 채로 발견된 것이다.

 

경찰은 "가족에 미안하다는 취지의 유서가 자택에서 발견됐다"며 "유족의 뜻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또 "CCTV 및 현장감식, 검시 결과, 유족 진술 등을 종합하면 현재까지 타살 혐의점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극단적 선택의 원인은 우울증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정 전의원에 빈소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많은 정치권 인사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어린시절"

정두언 전 의원은 1957년 서울에서 운전기사인 아버지와 공사장 잡일을 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방 후 만주에서 귀국하여 정성태 의원의 운전기사를 한 인연으로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다.  

 

신민당의 정치인이며 6.3 사태 당시 한일협정 반대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던 정성태는 아버지와 같은 고향 출신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창서국민학교와 배문중학교를 졸업한 정두언은 청소년기에 가정이 불우한 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서대문 모래내 시장에 좌판을 펴서 5남매를 교육시켰다. "아버지는 늘 밖으로 도셨고 수시로 어머니를 구타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너무 두렵고 싫어서 자기애 또는 자존심을 들어냈다."며 자신의 불우한 유년시절을 고백했다.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무역학과에 진학한 그는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spirit of 1999'라는 이름의 록밴드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보컬을 맡은 정두언의 인기는 스타급이었다. 이후 사회생활을 할 때도 술자리나 회식 또는 연수회에서 늘 사회를 맡았고 분위기를 주도했다.

 

"관료시절"

대학 졸업을 앞두고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고시 합격자들에게 부여되는 특혜인 장교 복무를 마다하고 사병으로 자원 입대하여 강원도 양구의 부대에서 육군병장으로 만기전역하였다. 그 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 사무관시보에 임용되었다. 

 

노태우 정무 제2장관을 보좌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20여년 간 정무장관실, 문화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등을 거쳤다. 노태우가 문화체육부장관으로 발령나자 그를 따라 문화체육부에 배속되어 올림픽 개최 지원업무를 담당하였다. 1985년 1월에는 국무총리실로 발령, 청소년대책반에서 근무했다.

 

1987년 4월에는 4.13 호헌 결사 반대 운동에 동참했다. 그 해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KBS 방송의 드라마급 주연을 

뽑는 KBS 탤런트 공채에 응시했던 4단계 최종 시험까지 합격했지만 아내와 가족들의 만류로 스스로 포기했다.

 

1991년 미국으로 특별 유학, 2년 간의 연수를 받았으며 이 기간 중 조지타운 대학에도 다니면서 정책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국무총리 비서실로 옮겨 국무총리실 정무 비서관, 정보 비서관, 공보 비서관 등을 지냈다.

 

"정치인"

2000년 이회창의 권고로 정계 입문을 결심하고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같은 해 서울 서대문구에 출마했다가 장재식 후보에게 2000표 차이로 낙선했다. 2001년 공무원 생활의 경험을 근거로 총리 등 행정부 고위 관료의 부끄러운 실태를 공개하고 비평한 책인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를 발간하였다. 

 

2001년 교통사고를 당해서 2개월간 병상에 입원했던 그에게 서울시장 출마를 준비하던 이명박이 찾아와서 캠프 합류를 권했다. 당시 이명박은 그에게 "공직생활 20년을 채워 연금을 타도록 해주겠다"며 영입했다고 한다. 그는 이명박의 컨셉이 시대정신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서울시장 출마를 거의 혼자 준비했다. 민선 3기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당선으로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되어 2002년 7월 1일부터 2003년 11월 1일까지 근무했다.

 

2004년 서대문(을)구에서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때 이명박 후보 캠프의 선대위 기획본부장과 전략기획 총괄팀장으로 활동하였다. 2007년 12월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17대 대통령 당선자 보좌역이 되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재선한 뒤 2010년 7.14 전당대회에서 지도부에 입성, 최고위원으로서 중도개혁과 보수혁신의 길을 주장하였고,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2009년 가수로 4집 앨범까지 냈다.

 

"비운의 책사"

이명박 정권의 개국공신이었던 정 전 의원은 한때 '왕의 남자'로 불릴 만큼 MB의 최측근으로 꼽혔다. 그러나, 그는 정권 초기 (형님)이상득 전 의원의 2008년 총선 불출마를 촉구했고 그후로도 이상득 및 그 측근들(임태희, 박영준 등)의 권력사유화를 계속 비판하다가 결국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이명박 당선의 1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MB정권 내내 변방에서 돌았으며 심지어는 남경필, 정태근과 같이 이상득이 배후 조종한 것으로 의심되는 불법사찰까지 당했다.

 

2012년 솔로몬 저축은행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이상득과 함께 기소되어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10개월간 구속 수감됐다. 이후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고 정치적으로 재기했지만, 결국 4선 도전에 실패했다. 이때부터 정 전 의원은 극심한 우울증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 무죄 확정 후 6,500만원 가량의 형사보상금을 받았으나 전액 기부하였다고 한다.

 

정 전 의원은 '최고의 정치, 최악의 정치'라는 제목의 참회록에 "MB에게 속았다"고 썼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자원외교가 잘 됐다 등의 자화자찬으로 일관하자, 이 내용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중도실용을 내세워 당선됐으나 집권 뒤 '꼴통 신자유주의'로 복귀한 MB 정부를 가리켜 "서민대중을 우습게 여긴 오만과 독선의 산물"이라고 직격했다.

 

MB정부를 비판한 건 "책임 때문"이라며 "이명박 정부는 한마디로 실패했고 그러므로 나도 실패한 것이다. (정권 내내)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고 끝까지 비판의 입장을 고수했다고 내 책임이 면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2018년 1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2007년 대선 때, 경선뿐만 아니라 본선까지 포함해서 당락이 바뀔 정도의 '경천동지'할 일이 세 가지 있었다"고 했던 정 전 의원의 생전 인터뷰가 인터넷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그는 무덤까지 갖고 가겠다며 말을 아꼈고 결국 이 같은 인터뷰를 한 지 약 1년만에 그 말을 지킨 셈이 됐다.

 

"합리적 보수"

정계를 떠난 뒤로 각종 TV와 라디오의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촌철살인의 정치 평론가로 맹활약을 해오던 고 정두언 전 의원은 여야를 막론하고 "합리적 보수"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힌다. 

 

한때 소위 "MB 저격수"로도 알려졌었고, 문재인 정부는 물론 자유한국당에 대해도 "합리적 보수"입장에서 쓴소리를 많이 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17일 정두언 전 의원을 추모하며 페이스북에서 "한국의 자칭 '보수'가 이 분 정도만 되어도 정치발전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나의 불민함에 대해서 종종 따끔한 비판을 하셨지만, 사실을 왜곡하는 중상이나 할퀴고 후벼 파는 식의 비방이 아니어 성찰의 기회로 삼았다"고 적었다.

 

한 언론인은 칼럼을 통해 정두언 전 의원의 극단적 선택은 고 노회찬 전 의원을 떠오르게 한다며, "고 노회찬 전 의원 역시 '합리적' 진보였고, 대화가 통하는 정치인이었다. 두 고인 모두 평소에 소신껏 나름 깨끗한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자존심과 명예에 상처를 입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정말 '없으면 좋겠다'하는 정치인들은 멀쩡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꼭 필요한 인물들은 스스로 사라져버려 참 안타깝다." 고 적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과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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