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걸음을 걸어도 나답게 (1)
저자는 전 세계가 감동한 세기의 발레리나, 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강수진이다.
2007년, 최고 장인 예술가 장인의 칭호를 부여하는 캄머탠저린(궁중무용가)에 동양인 최초로 선정되었고, 뛰어난 예술가로서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며 독일정부에 기여한 공로로 2014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부의 공로훈장을 받은 강수진의 인생수업을 소개한다.
10대는 그저 발레가 좋았다. 20대는 무조건 열심히 했다. 30대는 내가 뭘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춤을 췄다. 그리고 40대가 되고서야 비로소 무대를 즐길 수 있게 됐다. 놀라운 것은 무대를 즐기게 되자 더 자유롭게 배역에 빠져들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40대에 15살 줄리엣이 20대에 선보인 줄리엣 보다 더 순진무구했다. 역할에 빠져들면 나이는 사라지고, 캐릭터만의 살아 춤춘다. 젊은 시절엔 머리로 춤을 췄다면, 연륜은 내게 자유로운 영혼의 춤을 선사했다. 은퇴하고 ‘무대가 그립지 않냐’는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 업이 답한다. 나는 하루하루 백 퍼센트로 살았기에 은퇴 무대 앞에서 일말의 아쉬움도 없었다고.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는 1975년에 그레이스 켈리 왕비가 세운 세계적인 명문 발레학교다. 중학교 3학년 시절, 당시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 교장이었던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선생님이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선생님이 한국을 방문한 것은 발레 불모지게 가까운 한국에서 발레에 재능 있는 진주를 발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선생님 눈에 띈 것이 나였다. 큰 동작 없이 가만히 서 있는데도 관객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고 하셨다. 타고난 아우라가 있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부모님께 유학을 권유하셨다.
"수진은 10만 명 발레리나 중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아이입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면 분명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성장할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10만분의 1이 되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더 대단한 것은 10만 명 중에 잠재력을 가진 1명을 찾아내는 안목과 그 잠재력이 발휘될 때까지 기다려준 스승님의 인내심이었다.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셨을 때의 그 확신, 믿음이 나를 주저 않고 모나코로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뒤로 힘든 시절에도 포기하지 않고, 정점에 섰을 때에도 초심을 지키며 발레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스승, 마리카 선생님 덕분이었다.
선생님은 생전에 몸만 있고 영혼이 없으면 시체이고, 영혼만 있고 몸이 없으면 유령이라며, 발레에는 몸과 영혼의 조화로움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훌륭한 발레를 하려면, 먼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더 높은 도약을 위해서는 실력뿐 아니라 인성을 키워야 한다는 강한 신념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아프지 않으면 ‘어제 내가 연습을 게을리 했나?’하는 의심이 들곤 했다. 연습이 유독 만족스럽지 못한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충분히 몰입하지 못한 날이었다. 집중력이 떨어져 목표의 95%밖에 해내지 못한 날은 잠도 잘 안 온다. 조금이라도 일찍 극장에 가서 연습하고 싶어 다음 날은 알람이 울리기도전에 눈이 번쩍 떠졌다. 어느 날보다 더 몰두했다. 몰입하여 연습한 한 시간은 대충 연습한 세 시간보다 강했다. 하루 4시간 자면서 일한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깨어 있을 때 얼마나 몰입하느냐 하는 것이다. 열심히 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두뇌, 마음, 에너지를 한 곳에 다 쏟아야 성과가 난다.
평론가들은 내가 해온 발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로 작품을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해내는 능력을 꼽기도 했다. 작품 해석에 대한 열정으로, 나는 매 공연마다 처음 작품을 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으려 노력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 나 자신을 잘 알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자. 나에게 좀 더 정직해지자. 남들 눈에 보이는 나보다, 내 눈에 보이는 나를 더 신경 쓰자.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도록 나를 갈고 닦자.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그것을 보완할 나만의 방법을 찾자. 나만의 스타일은 내 안에서 탄생한다.
나는 경쟁하지 않았다. 단지 하루하루를 불태웠을 뿐이다. 그것도 조금 불을 붙이다 마는 것이 아니라 재 한 점 남지 않도록 태우고 또 태웠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찾아오면 간직하고 있던 단 한 점의 불씨를 또다시 큰 불로 키워냈다. 그런 지루하고도 치열한 하루하루의 반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누군가와 경쟁하고 비교한다고 해서 당장 내가 꿈꾼 무엇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이기거나 상을 타서 이루는 성공의 기준이란 너무도 상대적이어서 만족감을 줄 수도 없다. 하지만 누구나 지금 나의 경쟁자보다 더, 어제의 나보다 더 노력하는 건 할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윤필립 | 필리핀 중앙교회 담임목사, 아브라함 신학교 총장 저서 : ‘그들에게는 예수의 심장이 뛰고 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