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 명인 - 김죽파 선생

완결된 칼럼

가야금 명인 - 김죽파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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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산조에는 여러 유파가 있지만 현존 하고 있는 유파 중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산조는 김죽파 류이다. 

 

김죽파 선생의 본명 은 김난초(1911-1989), 호는 죽파이다. 김죽 파는 산조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김창조 선생을 조부로 두어 어렸을 때부터 조부의 가야금 소리를 듣고 자랐다.  생후 10개월만 에 어머니를 여윈 김죽파는 조부모 손에 키워졌는데, 김죽파가 일곱살 쯤 될 무렵 옆집 할머니가 김죽파가 연주하는 가야금 소리를 듣고 조모에게 가야금을 가르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부 김창조는 죽파를 불러“너에게 가야금을 가르친 적이 없는데 들은 것만으로 연주를 했다고 하니 어디 한번 타 보거라”라고 했다. 조부 김창조 선생 은 김죽파의 가야금 연주를 듣고 나서는  아무 말없이 가야금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죽파가 가야금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이다. 전라남도 영암 출생인 김죽파는 전주권번의 학감으로 있던 할아버지를 따라 전라남도 전주로 가게 되었고 전주 권번에서 풍류, 산조, 병창 순으로 학습을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또 김죽파를 전주의 김복실 선생에게 보내 가곡을 배우게 하였다. 할아버지 김창조 선생은 매우 엄격하게 가야금을 가르쳤다. 김죽파의 솜씨 또한 뛰어나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권번 연습생들에게 도움을 줄 정도였 다. 7, 8개월 간의 전주 생활을 마친 김죽파는 다시 고향 영암으로 돌아갔다. 이후 김창조 선생은 건강이 악화되어 김죽파가 9세가 되 던 1919년 세상을 떠났다. 

 

김죽파의 아버지는 김죽파가 가야금 타는 것을 싫어했지만 부친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그냥 두고 보았는데 부친 김창조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김죽파를 시집 보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죽파가 이복동생과 함께 산조가락을 흥얼 거리며 놀고 있었는데 이를 본 계모가 아버 지에게 일러바치는 바람에 김죽파는 많은 매를 맞게 되었다. 김죽파를 끔찍히 아꼈던 할머니는 밤새 울고난 다음날 새벽 김죽파를 데리고 목포로 내려와 8년 약정으로 김죽파 에게 양부모를 마련해 주었다. 

 

양부모에게는 김죽파 외에도 춤과 소리 에 능한 박향초라는 양딸이 있었다. 양아 버지 집에는 전통 음악인들이 자주 모였는데 김죽파가 11세일 때 스승 한성기와의 운명 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김죽파는 13세가 될 때까지 2년 동안 스승 한성기로부터 산조와 풍류 그리고 가야금병창을 배웠으며 전라도 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활약하게 된다. 김죽파는 김창환이 이끄는 협률사에 참가하 여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연주를 했다. 김죽파는 주로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했으며 악극에서는 향단이 역할도 했다. 

 

김죽파는 17살이 되던 1927년 조모와 함 께 서울로 올라와 조선권번에 적을 두었다. 조선권번에는 가야금부, 무용부, 양금부, 시조부, 가곡부 등이 있었는데 매달 일정한 돈을 내면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김죽파는 긴잡가를 가르치는 권번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 남도악 선생을 집으로 불러서 공부했다. 김죽파는 가야금 외에도 당대 최 고 명창 임방울, 김정문에게 판소리를 사사 했고, 한성준에게는 승무를, 오태석, 심상건, 박동준에게는 병창을 배웠다. 죽파가 전라도 에서 배운 풍류를 서울의 풍류방에서 타면 그 인기가 아주 대단했다. 김죽파는 가끔씩 이곳저곳 요정에 불려다니며 연주를 했다. 김죽파는 권번에 속해 있었지만 연주나 무용 에 재능을 보여주는 예기였지 술대접을 하는 화초기생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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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파는 틈틈히 풍류(몇몇사람들이 모여 함께 음악을 연주하며 친목을 도모하는 모 임)를 즐겼는데 그곳에서 이민택이라는 사람을 만나 22세에 결혼을 하게 된다. 이들 부부는 풍족한 생활을 하지는 못했으나 자주 풍류를 즐겼다. 죽파는 결혼 후 모든 연주활동을 중지하지만 이 때가 자신의 인 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1942년 죽파 나이 32살에 남편을 폐결핵으로 잃게 된다. 이민택은 죽으면서 가장 친한 친구인 이완규에게  죽파를 돌봐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6.25전쟁이 끝나고 45세가 되던 1955년 죽파는 재혼한 남편 이완규의 친구 부인인 이난향의 생일에 초대를 받게 된다. 이난향 은 조선권번 기생의 우두머리인 소장을 지낸 여인으로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난향은 이미 전해 들은 바가 있어 김죽파에게 가야금 연주를 부탁했다. 마침 그 자리에는 당시에 내노라 하는 정·재계 인사들의 부인인, 장택상(전 국무총리) 의 부인, 신용익(대한항공 창업주)의 부인, 김태선(전 서울시장)의 부인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이미 다른사람에게 가야금을 배우고 있는 중이라 가야금에 대해 좀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김죽파의 가야금 연 주를 듣고는 김죽파에게 사사 받기를 원 했다. 이들은 죽파의 집에 찾아가 남편의 허락을 요청했다. 죽파의 실력은 소문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제자들이 늘 어가기 시작했다. 김죽파는 이렇게 일반 인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치면서 음악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널리 유행하던 성금연 산조와 김윤덕 산조에 단모리가 있는데 죽파는 이를 듣고 세산조시를 작곡 함으로서 그 틀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할아 버지 김창조 선생과는 다른 심상건류 산조를 그에게 직접 배웠다. 

 

김죽파는 이후‘목요풍류회’에 참석해 연주를 했다.‘목요풍류회’는 목요일에 만 나 연주를 해서 목요 풍류회라고 불리웠는 데 현재에도 이렇게 요일을 붙인 풍류회가 여럿 존재한다. 또 이재숙(서울대학교 국악 과 교수), 김정자(서울대학교 국악과 교수) 등의 교수를 제자로 거두게 된다.  

김죽파 선생은 1978년 1월2일, 68세에 중요 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한지 60여년만에 처음으로 국립 극장에서 국립국악원이 주최하는 제1회 무형문화재 정기공연에서 공개연주회를 갖 게 되었다. 

 

김죽파는 1979년 할아버지 김창조가락 에 진양조 7장단·중모리 4장단·자진모리 4장단·휘모리 51장단과 무장단의 일부분, 그리고 세산조시 7장단 등의 가락을 추가하 여 약 55분에 이르는 김죽파산조를 완성시 켰다. 이후 1989년 79세의 고령으로 일본 오 사카와 동경에서 연주했으며 같은 해 뿌리깊 은 나무사가 제작한 <산조 전집>을 취입했 다. 그리고 그해 5월 19일 타계했다.  

필자는 1990년 5월 김죽파 선생 타계1주 년 기념연주회에 연주자로서 참가한 적이 있다. 당시 국내에 10개 정도의 대학에 국악 과가 있었는데 거의 모든 대학의 가야금 교 수들이 김죽파 선생의 제자였다.  

 

참고문헌  

문재숙 < 김죽파 가야금 산조연구>

양승희< 악성 김창조선생>

 

 

조은정 | 전 UCLA 민족음악과 강사, 가야금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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