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광복절특집- 민초들의 피와 땀으로 되찾은 나라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캘리포니아중부 아주 작은 도시 리들리(Reedley)주택가와 마주보고 있는 리들리 공동묘지는(Reedley Cemetery) 고요하다. 오랜 기간돌보지 않아 풀에 가려진 묘비부터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이곳에 머물렀음을 증명하는 오래된 비석들도 많다.
이곳에선수많은 망자들의 이름 가운데 낯익은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쟝석일’씨. 누군가의아버지였던 그는 채 환갑이 되기 전 세상을 떠나 이곳에 잠들어 있다.
리들리 공동묘지는1862년에 건립된 캘리포니아 주 정부의 공동묘지로 여기에는146기의 한인묘지가 있는데 대부분 초기 이민자들로 90% 가까이가무연고자들로 알려져 있으며 미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동참했던 인물들도 많이 묻혀있다. 이들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매년 두 차례(메모리얼데이와 광복절)에 재미 중가주 해병대전우회가 중심이 되어 태극기 게양 및 묘지 관리 행사를 약10년째 시행하고있다.
올해도 광복 72주년을맞아 오는 8월 12일(토)오전 11시 이곳에서(Reedley Cemetery District, 2185 S. Reed Ave. Reedley, CA 93654) 광복절 기념식과 애국 선열 추모 행사가 열린다.
고단하고 서러운 노동자의 삶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은 알려진 대로는1903년 1월 일군의 조선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101명의 조선인들을 실은 최초의 이민선이1902년 12월 22일 인천을 출발해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후 1905년 일본의 제지로 이민이 중단되기까지 총7,226명의 조선인들이 하와이에 왔다.
이들 중 84%는 20대의 젊은남자들이었고 9%가량만이여성들이었으며 7%가량이 어린이들이었다. 이러한 인구 구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초기 이민자들은 빠른 시기에 큰돈을 벌어서 자기 고향으로 금의환향 하려는 임시체류자(sojourner)의 성격이 강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오아후 섬 와이아루아(Waialua)농장의모쿨레이아(Mokuleia)캠프에서 본격적인 이민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오전 6시부터오후 4시 30분까지하루 10시간씩 노동을 했다. 목에 번호표를걸친 채 하루 종일 허리조차 제대로 펼 수 없을 정도로 일했다.사탕수수를자르는 일은 힘든 일이었기에 노동자들의 손은 물집투성이로 변하여 심하게 갈라지기도 했다. 루나(luna)라고 불렸던 감독관이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노동자들을 감시했다. 이들 감독관들은 일하지 않고 있는 노동자들을 발견하면 종종 채찍질을 하기도 했다.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하와이로 이민을 왔던 차의석은 훗날 자서전인The Golden Mountain에서 다음과같이 회상한다. “어른 크기만한곡괭이가 내게 주어졌다. 나는 그커다란 곡괭이로 가지를 자르고 뿌리를 파야 했다.그 곡괭이는너무 크고 무거웠으며 내 손은 너무 작고 여렸다.얼마 지나지않아 내 두 손바닥에는 물집이 잡혔으며 피가 흐르고 말았다.”
월급은 한달에15~17달러. 여자나 소년들은 하루에 50센트 정도였다.
한편 지난 2010년 공식기록과 달리,19세기 중후반이미 1천여 명이중국을 거쳐 유타주로 이동, 대륙횡단철도부설 공사장과 광산에서 일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는데 유타대 명예 교수였던 지리학자 이정면 교수는 1860년대에 동, 서부에서 각각 건설된 철도 교차 지점인 유타주 골든 스파이크와 금, 은, 구리 광산등이 산재한 중서부에 노동력 수요가 많아 중국 등 외국 근로자들이 대거 몰려 들었고 이 와중에 한인들이 유입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솔트레이크시티 시립 묘지 등의 묘비와 사망자 명부를 살펴보다1890년대 이전사망자 중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이름, 한글 묘비를 찾아냈으며 이는1800년대 중반에건설된 미 대륙횡단 철도공사에 한인들이 선로공(trackman)이나 채탄부(trackgang)로 일했음을시사해준다고 덧붙였다. 이어"여러 자료에따르면1860년대 학정과기근을 견디지 못해 약400만 명이 조선 땅을 등졌는데, 중국 만주로떠난200만 명중 일부가 중국인 노동자(Chinesecoolies)들에 섞여이들이 유타주의 철도 공사장으로 유입될 때 따라온 것으로 추정된다”며 “1924년 3월 8일 유타주 캐슬게이트 광산 지하 갱도에서 두 차례 대폭발 사건이 발생,171명이 생매장됐는데이들은 한국인 3명을 포함해대부분 24개국 출신의외국인이었다. 이 사건을조사하던 중 인근 묘지에서 '원적 한국, 류공우, 경긔 포천'이라는한글로 된 묘비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솔트레이크시티유타 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39상자 분량의 커네컷 동(銅)광산 자료중 고용자 명부(EmploymentCard)에 따르면철도 공사 완료 후 한인들이 광산 지대로 옮겼으며1909∼20년 고용된인부들의 출신국 혹은 지역이 '한국(Corea,Korea)', '전라도(Jullado)'등으로적힌 '한국인(Corean)'411명이 있었다.
초기 한인이민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류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미국으로 건너 간 정치 망명자들이다.1910년부터1924년까지541명 가량의 학생들이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에 왔다.그들은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한인 사회의 지적・정치적 지도자로서 부상했고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은 조국에
시간이 흘러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미국 본토의 철도 건설 현장이나 과수원들에서 일하면 하와이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1903년부터 1915년까지 총 1,087명의 한인들이 미국 본토로 이주했다. 그 본토가바로 캘리포니아 중부의 농장 지역인 리들리와 인근 다뉴바(Dinuba)다.
(사진=1939년에 건립한리들리 장로교회.1959년3.1절 기념예배 후 찍은 사진과 현재 모습)
캘리포니아에서의 생활은 보다 안정되어 성공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털 없는복숭아`로 부르는 `넥타린`(Nectarine)은 경남통영 출신의 김형순(HarryS. Kim, 1886~1977)이 개발한신품종 복숭아였다. 통역관으로서1903년 첫이민선 갤릭호를 탄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본토에 입국한 다음 1916년 리들리에 정착해 대학 교수의 도움으로 넥타린을 개발했다. 미국인들은복숭아의 잔털에 특히 알레르기가 심하다는 점에 착안한 그는 조선의 천도복숭아를 염두에 두고 복숭아와 자두를 육종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처음에는묘목을 판매하던 김형순은 아예 `김형제상회`(KimBrothers, Inc.,)를 통해미 대륙 전역에 넥타린을 판매함으로써 미주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그들은 동포들의 구호 사업에 앞장 섰으며 독립운동의 자금줄이 됐다.
사진=리들리의<김형제상회>건물. 지금은부동산회사 오피스로 사용되고 있다.
지난 해 4월 뉴욕일보의보도에 따르면 상해 임시정부 설립 초기에 북미대한인국민회(총회장대리 백일규)에서 30만 달러의애국금을 거둬 납입하기로 했다는 비밀 문서가 발견되었다.1932년에 만들어진이 문서는 뉴욕시립대 퀸즈칼리지 재외한인사회연구소에 교환 교수로 재직중인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김재기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부발간 비밀문서<조선민족운동연감>에서 확인되었다. 400여 쪽에달하며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수립된 이후1932년까지 13년간 활동이 날짜 별로 정리되어 있는 이 비밀 문서26쪽의 1919년 9월 3일자에는 “샌프란시스코에있는 북미대한인국민회총회장대리 백일규가 미국 교민들의 애국금30만 달러를납입하기로 보고하였다”고 적혀있다.
재미한인들이 상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 속에 독립 자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는 근거는 1930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에서도나타난다.1930년 5월1일자에소개한 상해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대한인국민회 백일규 총회장에게 보낸 감사의 편지에는 “다시금감복한 것은 수년간 우리 독립운동이 침체상태에 빠졌던 현상이 광주학생운동으로 기인되어 강경히 진작됨에 따라 정부의 비용도 가일층 호변한 차시에그것까지 유념하시어 영수증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성의를 다하시와 인구세(人口稅)를 또다시 보내주심을 더욱 감격합니다. (대한민국 4월2일 김구)”로 감사의표시를 하고 있다.
상해임시정부의독립운동 자금은 중국의 장개석 정부와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받은 지원금을 제외하면 미국을 비롯한 중국과 소련에 거주하던 한인 디아스포라가 경제적어려움 속에서도 애국금, 인구세, 의연금, 후원금등 다양한 이름으로 송금한 돈인데 미국 동포들의 성금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자료에 의하면 1919년 5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13만1,909달러의 예산이 사용되었는데 수입으로 동포들의 애국금 8만6,567달러, 충의금 1만4,487달러, 구미위원회 1만2,354달러로등으로 구성되었다. 초기 임시정부예산의80% 정도인 10만 달러규모가 미국 동포들의 성금으로 마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뉴바경찰서(다뉴바한인교회터) 앞에 세워진애국 선열기념비에는1918년부터1919년까지상해 임시정부 수립 지원금 기부자 75명의 명단이기록되어 있는데 총액은$13,835 다. 그 외에도열악한 노동 환경을 견뎌내며 받은 형편없는 품삯에서 기꺼이 덜어내 독립 자금을 마련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도기억해 주지 않는 그들의 이름은 오직 리들리와 다뉴바의 묘지 비석 위에만 쓸쓸하게 남았다.
사진=다뉴바스미스-마운틴묘지 입구와 그 곳에 묻혀있는 한국인 김성수 씨 묘비
애국자는 누구인가
2014년 경향신문은 단독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굴한1910년대 후반과1920년대 초하와이 한인기독학원 책임자이자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이면을 보여주는 기록을 보도했다. 민족문제연구소발굴 사료에는 이승만이 자신이 책임자로 있던 학교에서 친일 미국인 여교사를 편든 사실이 기록돼 있다. 또 이승만은 하와이에 한인 학교용 부지로 쓰기 위해 공금으로 토지를 매입했다고했지만 실제 이승만이나 그가 운영한 기관이 해당 부지를 소유한 등기상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다.
하와이 ‘더 퍼시픽커머셜 애드버타이저’지는1918년 5월 “이승만이운영하는 한인 여학교에서 레아히 팜 부지에 속한1만1385평 땅을확보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이 땅 소유권은 이승만이나 한인기독학원 법인에 속한 적이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하와이주정부 등기소의1918~1923년 부동산거래기록을 검토한 결과 이 부지 주인은P.E.R 스트라우치라는 부동산업자였다. 사지도않은 땅을 샀다며 학교 건축 기금을 모았다.
이승만은 돈을 모으고도 학교를 짓지 않았다. 대신1918년 카이무키지역 폐교를 임차해 한인기독학원 건물로 사용했다.이승만은1922년 민교감에게 보낸 편지에서“(7000달러의) 학교 부채를청산할 방법이 없다면, 폐교하는것이 좋다”고 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이승만의 독립운동 자금 운용을 추적하던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개인 재산 일부를 포착했다. 1913년 2월 하와이로 온 이승만은 줄곧 한인 사회의 도움으로 생활했지만 10년 뒤약8000달러의돈을 개인 명의로 썼다.1923년 3월 이승만은워싱턴에서 함께 활동했던 변호사 프레드 돌프에게“요즘엔한 달에100달러로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생활비는한인들이 모아준 것이었다. 당시 하와이한인들은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일하며 4인 가족기준 한 달에25~30달러를벌었다. 이듬해 12월 이승만은4000달러로개인 토지를 비밀리에 매입했다. 하와이주정부등기소에서 발견된 토지 매입 계약서는1924년 12월5일 이승만이4000달러를주고 팔롤로 힐 일대 부지3500여평을샀다는 내용이다. 1년 뒤이승만은3986달러를 ‘동지식산주식회사’에 투자했다.
일본 제국주의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올해로 72년. 상해 임시정부를계승한 대한민국은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 받으며 초대 대통령까지 지냈던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만주 벌판에서,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농장의 땡볕 아래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이름 모를 이들의피와 땀으로 되찾은 나라다.
(사진=리들리김형순 씨 자택 인근 공원에 세워진 독립문과 리들이 한인역사기념각)
8.15광복절특집- 민초들의피와 땀으로 되찾은 나라, 다뉴바애국 선열기념비, 한국인 김성수 씨 묘비, 리들리 공동묘지, Reedley Cemet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