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역사-사회과학 교과과정 개정, 무엇이 달라지나? (02)
위안부 내용 외에도 이번 교과과정 개정과정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온 이슈들은 다음과 같다.
바탄 죽음의 행진(the Bataan Death March)
태평양 전쟁 초기에 일본군이, 7만 명의 미군과 필리핀 군 전쟁 포로를 학대한 행위로, 1942년 4월 9일 필리핀 바탄 반도 남쪽 끝 마리벨레스에서 산페르난도까지 88km, 카파스부터 오도널 수용소까지 13km를 전쟁 포로 76,000여명을 강제로 이동시켰는데 이 과정 중 구타, 굶주림 등으로 많은 포로들이 사망했으며 낙오자는 총검으로 찔려 죽음을 당했다. 결국 7,000명~10,000명의 전쟁 포로들이 행진 도중에 사망했고 54,000명만 수용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정글 속으로 도망쳤으며 이 책임으로 필리핀 침공 작전을 계획한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은 1946년 4월 3일 마닐라 군사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 받고 처형된다. 하지만 고의적 명령 왜곡으로 이 사태를 초래한 쓰지 마사노부 중좌는 처벌은커녕 전범으로 기소되지도 않았다. 이 사건은 일본군의 주요 전쟁 범죄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은 ‘바탄 죽음의 행진’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퇴역 미군 레스터 테니(94) 아리조나 주립대 명예교수를 2015년 4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미 일정 중 워싱턴 만찬에 초대하는 등 '전범국 이미지'를 씻어내기 위한 이벤트들을 정교하게 배치하기도 했다.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the Armenian Genocide)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6월 24일 아르메니아 대통령 궁 연설에서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오스만 튀르크(현 터키) 통치자들이 아르메니아인 150만 명을 학살한 참극을 ‘제노사이드(genocide)’라고 지칭했다. 또 지난 6월 2일 독일 연방의회는 1915년 터키가 아르메니아 민족에 가한 공격행위는 국제법상의 집단 학살(Volkermord, genocide)이라고 규정했다. 집단 학살이란 국제법상 최악의 범죄이다. 종교적, 인종적, 민족적으로 구분되는 한 집단을 멸종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대규모 살해 행위가 발생한 경우에 인정된다. 그래서 터키 정부는 이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집단 학살'로 규정하는 문제와 희생자 수 등을 놓고 오스만제국을 계승한 터키와 아르메니아가 대립해왔으며 100주기인 지난해에는 국제 사회에서도 논란이 일었다.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the Armenian Genocide)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 당시 이슬람 민족주의자들이 오스만제국 내 거주하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에 대해 저지른 대규모 학살 사건을 말한다. 이 학살은1919년까지 이어졌다. 이는 현대사의 첫 조직적 학살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의 3국 동맹과 영국·프랑스·러시아의 3국 협상 간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제국은 러시아가 속한 연합국에 맞서기 위해 3국 동맹에 가담했다.
이때 러시아 접경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혁명 세력이 오스만제국을 공격하고, 1915년 영국군이 영토를 점령해 오자, 반란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이라크·시리아·팔레스타인 등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오스만제국이 아르메니아인들을 고의적으로 추위와 굶주림, 질병 등으로 죽게 하거나 학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1923년 터키 공화국을 수립했다. 아르메니아는 1918년 독립을 선포했으나 1차 대전 승전국들이 터키에 통합시키려 하자 오스만에 끝까지 항거해 1920년 구 소련에 편입했다. 이후 아르메니아는 소련이 붕괴된 후 1991년 9월 21일에서야 독립국이 됐다.
지난 4월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일에는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등 곳곳에서 수만 명이 터키 영사관 앞에 모여 집단 학살 인정 등을 요구하는 항의 시위를 벌였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또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 101주기 기념행사로 열린 오로라 인권상 시상식에 참석한 배우 조지 클루니가 당시 비극을 '집단 학살'(genocide)이라고 강조하면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도 했다.
시크교 혐오 범죄 (Violence and Discrimination Against Sikhs)
시크교는 9·11 테러가 발생한 이후 무슬림으로 오인 받아 증오 범죄의 대상이 돼 왔다. 테러 이후 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자 겉모습이 비슷한 시크교도들에게 불똥이 튄 것이다. 시크교는 1500년대 인도 북부에서 힌두교의 신애(信愛) 신앙과 이슬람교의 신비 사상이 융합돼 탄생한 종교다. 세계 5대 종교로 전 세계적으로 2700만 명이 넘는 신자를 거느리고 있으며 미국 내 시크교도는 50만 명 내외로 추정된다. 시크교도들은 머리를 자르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으며 외출할 때 터번을 둘러 무슬림으로 오인을 받는 사례가 많다.
2001년에 시크교도인 애리조나 주의 한 주유소 주인이 무슬림으로 오인 받아 한 남성의 총에 사망했다. 또 2012년에는 미국 위스콘신 주 밀워키의 시크교 사원에서 한 백인 우월주의자가 이슬람에 대한 적대감으로 난사한 총에 6명의 시크교도가 목숨을 잃었다. 2013년 미 위스콘신주 그린베이 지역에서도 백인 우월주의자가 시크교도 소유의 한 편의점에 불을 질러 6명의 시크교도가 사망했다. 지난해 시카고에서는 무슬림을 혐오하는 한 10대 소년이 시크교도인 53세 택시 기사에게 '빈 라덴'이라고 외치며 얼굴을 가격, 광대뼈를 부러뜨려 체포되는 사건뿐만 아니라 오렌지 카운티의 시크교도 사원 주차장에 세워진 한 트럭이 이슬람 신도의 것으로 오인돼 폭파되는 등 시크교도를 이슬람교로 오인해 이들을 대상으로 한 괴롭힘이나 기물 파괴 등의 사건 사고가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한 시크교도 여성도 미니애폴리스에서 비행기를 타려다 테러리스트일지 모른다는 다른 승객들의 의심으로 강제 몸수색을 당했다고도 하며 대부분의 시크교도들은 온라인상에서 모욕적인 말을 듣거나 거리를 지나가다 혐오의 눈총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한편 시크교도인 미국 육군 대위가 미군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해 턱수염을 기르고 터번을 쓸 수 있게 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지난 4월 미 육군은 성명서를 내 “심라트팔 싱 대위의 종교적 옷차림을 허용한다”고 밝혔으며 “종교적 복장 관련 기준에 대해 계속해 정보를 쌓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졸업생이자 아프가니스탄 전에서의 성과로 브론즈 스타 훈장을 받은 심라트팔 싱 대위는 군대 규정에 따라 줄곧 수염을 깎고 이발을 해 왔다. 작년 5월 미 국방부가 '종교적 신념에 따라 터번을 두르거나, 턱수염을 길러도 된다'는 지침을 발표했지만, 규정은 지난 2월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됐다. 이에 싱 대위는 소송을 제기했고, 이번에 승소해 턱수염을 기르고 터번을 두른 채 복무하는 최초의 미군이 됐다.
제니스 백, 로이스 리 기자
Vol.79